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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Mar 31. 2021

길에서 찾은 행복

영화 [시], 2010 /  [와일드], 2014

  코로나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앗아갔다. 코로나 시절 이 뜻밖의 세상에 어느새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만의 코로나 극복 방법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 그동안 은밀했던 혼자만의 읽고, 듣고, 보고, 걷는 이 자잘하고 소소한 몸짓을 활짝 펼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작년 9월 거리두기가 3단계로 격상되면서 덩그러니 남겨진 시간을 채우기 위한 첫 단추는 영화였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다양한 영화를 보면서 두 계절을 보내고 새 봄을 맞았다.


 좀처럼 챙겨 보기 힘들었던 유럽, 러시아 영화, 때를 놓쳐 버린 명작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관람은 코로나가 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영화는 2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르임에 틀림없다.

    


 윤정희 주연의 영화 <시>인간다운 아름다운 삶에 대한 갈구를 시 쓰기라는 여정을 통해 풀어낸 영화였다. 요란하지 않지만 타락한 세상을 향한 읊조림이 오래도록 울려 퍼진다.

여주인공은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지만, 세상에서 지켜져야 할 가치는 끝 잃어버리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던짐과 동시에 혼탁한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타락한 세상을 겪은 후 남긴 시 한 편은 주인공 스스로와 가엾은 어린 영혼을 위로하고, 심지어 관객까지 위로하기에 이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세상이 나아가야 할 길, 인생을 찾아가는 길, 자신을 향한 길을 따라 걸었다.



 시를 좋아한다.

마음이 헝클어지고, 무너질 때 서점으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시집을 펼쳐놓고 축축이 젖은 마음을 널어 말렸다. 제목만 읽고도 가슴이 무너져 시집을 끌어안은 적도 있고, 시집에 눈물 자국을 남겨 어쩔 수 없이 시집을 사 들고 들어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한때 시는 내게 절친한 친구 이상이었고, 저명한 상담 선생님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  시는 감정을 떠오르게 한다. 무안해서 뭉개버린 감정이 되살아나기도 하고, 꺼내 보이기 힘들어 감추었던 기분이 불현듯 등장한다. 시를 읽으면 낯설고 익숙한 감정이 둥둥 떠다니다 끝내는 밑바닥에 가라앉은 말간 나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어 좋다.


영화  <시>에서 여주인공이 시상을 찾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무에 귀 기울이고, 길 위에서 대뜸 멈춰 꽃들을 바라본다.  찬찬하고 친근한 자연 배경과 여주인공의 단아한 걸음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영화 <와일드> 주인공 셰릴의 미국 서부 종단기는 상처 받아 잔뜩 겁먹은 걸음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당당함을 쟁취하는 걸음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온전히 기대고 의지했던 사람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곁을 떠났을 때의 황망함을 잘 알기에 셰릴이 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렸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스스로 포기하는 고통보다도 상실의 슬픔이 더 컸기 때문이다. 생전 엄마의 당부를 기억해 자신을 찾기 위한 길 위로 나선 셰릴을 열렬히 응원했다.  

   


  이른 나이의 결혼 생활, 말은 했지만 대화가 아니었고,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가슴속에는 설움이 쌓여갔다. 막막하고 답답할 때면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집 주변을 맴맴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다 얕은 동산의 산책길을 걷다가 어느 날 집에서 좀 떨어진 탄천으로 나서던 날이 기억난다.

새롭고 낯선 길을 처음 걷는다는 묘한 설렘으로 속상한 마음이 저 멀리 달아났다. 흐르는 물소리와 햇빛에 빛나는 나뭇잎들과 그 저편의 그림자들이 고단한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외로웠던 나와 슬픔 속에서 길을 잃은 셰릴을 치유하고 위로한 것은 길 위에서 만난 시간과 시간이 만들어 낸 자연의 진실함이 아니었을까?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는 거란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아름다움 속으로 언제든 들어갈 수 있단다.”     


  셰릴의 엄마가 딸에게 해 준 말이다.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빛나는 시간을 찾을 수 있고, 불행 속에서도 반짝이는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코로나로 어수선한 시국이었지만 영화와 시를 통해 아름다움과 충만함 사이를 수시로 거닐 수 있었던 일상은 또 다른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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