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이 아닌 약속
보통은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언제 어느 순간에 결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망상을 종종 하는 성향이지만 글 작가인 나를 그린 적은 없어서 이런 결심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해장을 하듯 속앓이 후에 글을 쓰는 편이라 SNS에 글을 자주 올리는 편이긴 했다. 모든 글을 한 곳에 모아 두고 싶진 않아서 계정에 따라 컨셉을 잡고 거기에 맞는 글을 올리는 식으로 운영해왔다. 인스타는 일상용, 디자인 작업 아카이빙용, 그리고 공간 답사용으로 나눠서 운영 중이다. 블로그의 경우 불특정 다수가 보아도 무방한 글은 네이버에, 커리어와 관련된 글은 브런치에, 그리고 가장 우울한 마음을 담은 비밀스러운 블로그는 티스토리에 있다. 아직 안 끝났다. 유튜브도 운영 중인데, 20~30초 내외의 일상 풍경을 담은 한 컷의 영상에 독서 기록을 설명글에 길게 남기는 다소 플랫폼과 맞지 않는 방법으로 쓰고 있다. 추억의 SNS인 싸이월드, 페이스북, Daum에서 운영했던 Yozm까지 하면… 꾸준한 헤비 업로더다. SNS 중독 쟁이라고만 스스로를 바라봤는데, 고마운 제안 덕분에 나도 글을 엮어 세상에 내보일 수 있겠단 용기가 생겼다.
책을 낼 제안을 건넨 건 피노키오다. 피노키오는 소아암 글 그림 작가로 3년째 투병 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독립 후 처음 진행한 인테리어 현장을 마감하던 날, 카페에 찾아온 클라이언트의 지인이었다. 피노키오를 만나기 일주일 전쯤 모르는 사람이 내 작업용 계정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서 답방한 날이 있었다. 피노키오의 그림과 글을 보니 우리 첫째가 다녔던 병원의 같은 병동에 다니는 듯했다. ‘병원의 간호사 선생님들의 계정을 통해 날 알게 된 건가?’ 의아해하며 아이 아빠에게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그런데 클라이언트를 통해 연결된 인연이라니! 작가라고 본인을 소개하는 모습이 당당했고, 나는 열아홉에 어떤 모습이었나 잠시 돌아보게 되었다. 내 명함을 건네며 병원에 대한 얘기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피노키오는 내게 본인의 명함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렇게 두 번째 디자인 의뢰가 성사되었다.
피노키오의 자화상이 담긴 명함을 만들고, 그 명함을 직접 건네받을 수 있어 감사했다. 주관이 뚜렷한 피노키오 덕에 빠른 속도로 일이 마무리됐다. 내가 3년 전 간병을 했던 그 병동에 내가 디자인 한 명함이 여기저기 전달될거라 믿고 있었다. 당시에는 벅찬 마음과 기묘한 감정이 뒤섞였다. 그 뒤로도 카페 운영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자, 그리고 피노키오를 만나려고 카페에 갔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피노키오와는 깊은 얘기를 정말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다.
병으로 첫째를 잃은 상실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일과 학업에 매진하곤 했다. ‘이러다 갑자기 퍼지는 것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런데 피노키오와 대화하면 나의 상실을 꺼내보고, 들여다보게 된다. 눈치 빠른 피노키오는 그걸 알았는지 나와 대화할 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도 했다. 오히려 감사했다.. 꼭 해야 했던 일을 피노키오 덕분에 부드럽게 마주하고 있으니까.
인테리어 클라이언트에서 이제는 카페 사장님이 된 심 작가님과 피노키오, 피노키오와 가장 먼저 연이 닿은 박 작가님, 그리고 나까지 넷의 이야기를 엮어 책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 후에 왕 작가님도 사진작가로 합류하게 되었다. 심 작가님의 인테리어 제안에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처럼 피노키오의 집필 제안도 함께 하겠다 약속했다. 그렇게 나는 운명처럼 책을 쓰기 시작했다.
피노키오의 인스타 링크를 브런치 글에 게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공유했지만 피노키오의 연극이 제게 상처를 줬듯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단 우려에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