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열한 덕질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당신은 혈연관계가 아닌 타인에게 무한한 사랑, 시간, 돈을 쏟아부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물론 그 대상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모니터 안에 있을 수도 있다. 대상이 어느 차원에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대상과 내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사랑의 피드백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행복함을 주는 것, 그것을 덕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복을 입고 으르렁거리는 청년들의 덕질을 몇 년간 가열하게 했다. 덕질이 처음은 아니다. SM엔터테인먼트는 나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라 청소년기에는 신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신화의 전성기 때는 내가 학생이어서 본격적인 덕질을 하지는 못하고 그냥 소소하게 안방에서 좋아하는 정도였다. 내가 어느 정도 기동력과 구매력이 생겼을 때 그들은 차례로 군대를 갔다. 우리 사랑의 타이밍은 어긋나서 좋아만 했지 내 마음을 양껏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고정적인 월급이 나오고 있었고 시간도 여유로웠다. 자고로 덕질은 내 돈 팡팡 써가며 해야 재미있는 법이니까. 핸드폰만 켜면 온갖 영상과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줄 서야 하는 공연장에서 4시간을 서있다가 그다음 날 허리디스크로 입원한 뒤로는 돈을 내고 내 자리가 확보된 공연만 다녔다.
나는 당첨운이 아주 좋은 편이다. 그 운은 덕질에서도 잘 써먹었다.
티켓을 구입했는데 구입 후 티켓이 배송이 올 때까지 내 자리가 어딘지 모르는 기가 막힌 콘서트가 있었다. 2만 석이 넘는 공연이었는데 나는 무려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서 망원경 없이 생 눈으로 콘서트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었다. 공연 날, 공연장 앞에서 암표상들은 내게 그 티켓을 200만 원에 팔라고 했었다. 혈육은 나에게 무조건 팔라고 했지만 나는 200만 원짜리 티켓을 정가에 샀다!!!!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어찌 그 어렵다는 콘서트 티켓은 다 구해서 모든 공연에 참석을 했고, 해외투어로 국내 활동이 뜸할 때는 해외로 가서 공연을 보기도 했다. 엄마랑 같이 가면 좌석을 더 확보할 수 있는 공연에는 엄마까지 데리고 가서 그들의 섹시댄스(!)를 엄마와 같이 관람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행복한 시기를 지내다 어느 날 문득 그들의 활동이 궁금하지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일어난 이야기들, 기사들을 보며 덕질을 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건 관심이 없었다. 아.. 나 이제 탈덕했구나 싶었다. 집에 쌓인 굿즈들은 팔기도 귀찮아서 아는 덕질 메이트에게 무료로 보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짜게 식은 뒤였다.
덕질이 끝나니 너무 많이 남아버린 시간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덕질을 청산하니 덕질 메이트와 할 말이 없어져서 몇 년간 연락이 뜸했다. 그러려니 하고 지내다가 임신 중 조기수축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몇 년 만에 연락했는데 여보세요 도 없이 잘 지냈지?라는 안부도 없이 대뜸 "언니 이 XXXX를 어떻게 하지?"라고. 우리가 같이 좋아하던 멤버 중 한 명이 혼전임신으로 결혼을 발표했단다. 그녀는 내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나서 앞 뒤 생각 안 하고 전화를 했다. 내가 '야 ㅋㅋㅋ 안부도 먼저 물어봐라 쫌"이러니까 "아 맞다 언니 잘 지내지?" 하며 서로 큭큭대면서 바로 어제 통화한 것처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덕질이라는 매개체가 없이 그냥 친구가 되었다.
덕질은 끝났지만 친구가 남았다. 그녀는 손재주가 좋아서 나에게 우리 아기 사진을 왕창 달라고 해서 예쁜 달력을 만들어 보내주기도 하고, 나는 그녀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했다. 소개팅을 주선하면서 먼저 물어봤다. 상대방 남자가 너랑 나랑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을 할까? 친구(엑소) 소개로 만났어요 라고 할까? 하니 그냥 동아리 활동하다 만났다고 해 라고 해서 응 그러자 하고 합의했다.
덕질을 하면서 돈과 시간을 무한정 쏟아부었고 현재 내 손에 남는 것은 없다. 하지만 소중한 친구가 남았고 그때 당시 행복했던 내가 있다. 내가 지금 똑같은 돈을 썼다고 했을 지라도 그때 받은 행복을 또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찬란했던 전성기의 아이돌이 있고, 그 전성기에 같이 행복을 나눈 내가 있었다. 또한 지나가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있어도 그 노래가 그들이 부른 노래라면 기가 막히게 '어? 이거 뫄뫄 목소리인데?'라고 목소리를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그리고 여전히 내 비밀번호 속에 살아 숨 쉬는 그들의 데뷔일, 생일은 내 몸에 배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만약 이 글이 돌고 돌아 멤버 중 한 명에게 닿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고 메시지를 한 줄 남기고 싶다. 덕분에 행복했고,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