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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Jan 09. 2022

가족에 대하여

고 배은심 여사님의 부고에 부쳐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며 이런저런 운동노선과 사상을 학습할 때, 경계해야 할 태도로 '가족주의'를 배웠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쉽게 얘기하면 '우리끼리'를 경계하란 것으로 이해했었다. 같이 현장에서 운동하는 활동가들끼리 관계에만 집중하게 되다 보면 서로 잘 챙겨주는 소모임이나 동아리로 전락해 버린다. 그러니 그런 태도를 경계하고 끊임없이 대중들과의 저변을 넓히며 운동해라. 뭐 이런 거였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그렇게 서로 각별할 것 같았던 운동권 선배들이 훗날 죄다 도망치고 사라지고 하는 걸 목도하며, 애당초 '가족 같은 관계'가 실존하기는 하는 건가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더라. 가족이란 말을 가져다 붙이기엔 그때 운동권들이 서로 주고받은 상처는 너무 컸다.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가족'에 대해서도 계속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놈의 가족이란 게 뭔지. 


  나는 아직도 가족이라는 게 정확히 우리네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이제는 사이가 너무도 틀어져버린 내 동생과, 빚과 상처만 남기고 중학교 때 내 곁을 떠난 아버지. 그리고 억척같이 혼자서 우리 남매를 키워 낸 내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고민은 더 복잡해진다. 남보다도 못한 가족도 많고, 삶의 이유이자 애증의 대상이기도 한 게 가족인 것도 같았다. 학생운동을 하며 느끼고 목격한 가족의 의미는 알면 알수록 더 크고, 때로는 아프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간 집회는 세월호 참사 100일 집회였다. 그때는 선배도 뭣도 없이 혼자 갔다. 아마 그때 나중에 동지로 만났을 선배들을 알고 있었다면 함께 갔겠지만, 선배들과 인연이 없던 시절의 난 혈혈단신으로 서울시청 집회를 갔다. 집회 시작부터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더니 장대비가 되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도 얼른 근처 노점상에게 우비를 구입해 뒤집어쓰고 집회를 계속했다.


  시청 집회를 마치자 대오는 광화문으로 행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의회 즈음에서부터 바로 차벽에 가로막혔다. 10년도 안 된 이야기지만, 그때만 해도 광화문에서의 집회 행진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경찰 펜스와 시위 대오가 맞닿은 지점은 일촉측발이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에서 그렇게 충돌이 예상되는 대오의 맨 앞에 학생들이 서지는 않는다. 근데 그때 난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다. 내가 속할 깃발도 없이 홀몸으로 집회에 왔기에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겁도 없이 대오 맨 앞으로 나섰다.


  난 그때 본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는 시위대를 막고 선 의경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람이면, 심장이 있으면 제발 길 좀 터 달라"라고 울부짖으며 비 오는 아스팔트에 주저앉았다. 그 광경을 목도한 나는 그 자리에서 할 말을 잃었다. 목에 걸려있던 고등학생 학생증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운동을 그만둔 지금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자니 낯부끄럽지만, 아마도 내가 학생운동으로 내 대학시절을 보내게 된 데에는 그날 그 장면의 잔상이 너무 커서였던 것도 한몫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 가족의 이름이 있었다.




  몇 해 후의 이야기. 이번에도 광화문 근처에서, 무슨 집회였는지 실천이었는지를 마치고 조촐하게 선배 몇과 뒤풀이를 하는 자리였다. 교보문고와 종로 르미에르 빌딩 있는 뒤편 골목 어디에 있는 작은 오래된 호프집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도대체 이 놈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한탄하고 걱정하던 내 어머니와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운동권 자식 둔 집 치고 갈등없는 집이 없어서, 가족 문제를 도란도란 나누다 보니 한숨이 안주가 되어 버린 술자리였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유난했다. 특히 더 가난한 집, 늦둥이로 날 둔 덕에 나이 많은 내 어머니. 나는 사실상 한 명 밖에 없는 내 가족인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고민했다. 어쨌든 지지리도 없는 집에서 아등바등 나름 괜찮은 대학까지 올라왔다면, 이제는 멀끔한 직장에서 번듯한 명함 하나는 마련해 집을 건사하는 게 순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데모질에 빠진 아들은 가족을 배신하고 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요량으로 보였다. 이러니 내 어머니의 근심은 날로 깊어졌을 테다. 나도 이런 상황을 좀처럼 쉽게 외면하지는 못했고, 늙은 나이에 억척스럽게 돈을 벌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에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했다. 그런 생각 끝에 선배들에게 이런 이야길 했다.


  "가족 때문에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고, 가족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는 사람도 많을 것 같아요."


  그때 선배들도 이 말에 어느 정도 공감했던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투쟁의 현장에 나선 수없이 많은 이들,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된 이들을 수도 없이 목격하고 또 배웠다. 이소선, 전태삼, 박래군, 박정기, 배은심, 세월호의 유가족들, 백남기 열사의 가족들... 내가 지금 생각나는 대로 떠올리는 이름들만 해도 이렇게나 많다. 학교 활동하던 시절 해마다 때가 되면 유가협(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주관의 열사 추모제 행사 지원을 나가곤 했었다. 끊임없이 재단에 올려지는 영정 사진들만큼이나 많았을 그들의 가족들과 그 사연들.


  가족이란 이름 앞에 삶의 향방이 그렇게 바뀐 이들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이제는 운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어진 나도 부끄럽고 가슴이 저며 온다. 오늘 또 한 분이 먼저 보낸 아들의 곁으로 떠나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2. 01. 09.


사진 출처: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oid=003&aid=000800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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