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학생회, 20대 남성 이야기
<업로드를 시작하며>
대학에서 활동을 마치고 대형마트에서 돈을 벌던 시기 생각이 많았습니다.
대학에서 내리 몇 해를 졸업도 미루고 학생회 활동에 매진했었고, 그 마무리 무렵에는 학내 반성폭력 운동에 참여했던 남성 활동가였습니다. 반복되는 성폭력 사건 조사주체를 맡다가 결국 스스로가 소진되어 버렸고 그래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하는 시기에도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는 생각을 정리해야 했고, 제가 아는 한 가장 좋은 방법은 글로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글을 썼습니다.
몇몇 이들에게 전하기도 했던 글입니다. 양도 제법 상당했습니다. 그렇게 긴 글을 썼고, 뒤늦게 입대했다가 전역한 뒤 미뤄뒀던 학업을 마치는 중입니다. 돌고 돌아 언론고시(언론사 입사 준비 시험)를 준비하는 '언시생'이 되었습니다.
그간 혼자 품고 있던 글을 브런치에 조심스레 내어놓아 보기로 했습니다. 글을 마친 지가 2년이 넘게 흘렀으니 지금과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철 지난' 글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심스레 틈틈이, 글을 다시 다듬어 올려 볼 생각입니다.
대학과 학생회, 대학 내 성폭력과 반성폭력 운동, 20대 남성에 관한 긴 글입니다. 이름 걸고 글을 내놓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어려운 일인지 이제는 잘 알기에 조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고민과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처음 글을 써 보겠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다들 응원했지만, ‘진짜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의심했습니다. 사실 엄밀히 이야기하면 고졸 학력에, 저명한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시민사회단체나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조차 없는 제가 여성운동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디 하나 내어놓을 것 없는 부끄러운 글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앞섰습니다. 그런데도 주변의 응원 덕에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습니다.
글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저의 답답함이었습니다. 스물여섯 나이에 군대도 아직 다녀오지 않았고 입학한 이래로 내리 학생회 활동에만 매진해 온 저였습니다. 집안에서는 골칫거리였고, 후배들에게는 “학생회에 목숨 건 선배”였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학생회 활동을 쉬는 기간이 생겼습니다. 복학을 위해 휴식과 재정대책이 필요했고, 한 대형마트 보안팀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쓸 짬도 생겼습니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재정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지만, 쉼 없이 학생회 활동에만 매진해 온 저를 너무 무겁게 짓누르는 어려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활동하던 공간에서 잊을 법하면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었고,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사건조사 등을 도맡아 해나가다 보니 너무 많이 소진되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더 힘겹게 만들었던 것은 제 주변과 우리 학생사회의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남성이다 보니 주변 20대 남성 친구들의 평범한 생각을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지요. 그러나 벽으로 막힌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물며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문제를 바로잡는 아주 기본적인 활동에도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것은 무엇이냐.”, “너무 정치적인 것 아니냐.” 등등.
하지만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 말 못 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너무 많습니다. 슬픈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라는 공간이 우리 사회에서는 꽤나 진보적인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진취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대학사회에서조차 성폭력 피해자들과 성평등의 가치가 외면되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동시에 대학이라는 공간이 강남역 이후 여성주의와 백래시의 가장 뜨거운 각축전이었음에도 그 안의 현실을 대학생의 시선으로 조명하려는 시도가 별로 없었습니다. 대학과 대학 안의 여성운동, 그리고 20대 남성들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강남역 이후의 우리 사회가 마주한 과제들과, 그 해결의 실마리들을 대학을 조명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20대 남성들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알아야, 강남역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넘어 다음 세대의 성평등을 고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은 “이것 봐, 20대는 이렇게 한심하다니까?” 라거나, “감수성 부족한 인간들 다 천벌 받았으면.”이라는 마음으로 쓴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때때로 20대, 특히 남성들을 변호하는 듯한 느낌을 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원칙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특이하게도 20대이고, 남성이면서 대학사회에서 학생자치에 남들보다 긴 시간 매달렸고, 반성폭력 운동과 활동을 전개해 온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제 경험과 시각을 바탕으로 대학사회의 반성폭력 운동의 현주소를 진단해 보고,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대학생이면서 남성인 제가 쓰는 이 글이 그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2010년대 후반의 학생사회와 학생자치, 대학 내 여성운동에 대해 새로이 고민해 볼 수 있는 작은 계기만 되더라도 저는 너무나 뜻깊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많이 배우거나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활동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14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회 활동을 오래 했을 뿐입니다. 남들 졸업하고 취업할 시간에 학생회 활동에 매달렸더니 이력에 남은 감투(?)의 개수는 참 많아졌습니다. 제 후배들은 그런 저를 보고 “감투 콜렉터(Collector)”라고 놀리기도 합니다. 여하튼 그 과정에서 학생회 차원의 성폭력 대책위원을 여러 차례 맡았었고, 학과 학생회의 반성폭력 학생회칙을 함께 만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대학생의 시선으로 써내보려 합니다. 많이 아는 것도 배운 것도 없으니 글은 최대한 쉽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로 쓰되, 이제는 무용론까지 횡횡한 대학의 학생자치가 어떻게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위해 노력해 왔는지, 그 안에서 활동하는 주체들은 어떤 고민과 분투로 활동해 왔는지를 객관적으로 비추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또, 저와 제 주변 뭇 20대 남성들은 작금의 상황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부족한 저자가 쓴 미약한 글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 대학의 학생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의 대학가가 10년, 20년 뒤의 대한민국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대학에서의 싸움이 내일의 우리 사회를 결정한다는 믿음으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또 함께 고민해주셨으면 한다는 바람입니다.
2019년 크리스마스.
한양대학교 백남학술정보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