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도시, 쿠리치바(Curitiba) 답사기
채 일주일도 안 되는 빡빡한 일정에도 굳이 쿠리치바를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내 의지였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이역만리 브라질 땅에서 상파울루에만 머물다 가기엔 너무 아까웠다. 업무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딱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보지는 크게 세 곳, 모두 상파울루에서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들로 대략 예상되는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리우(Rio de Janeiro) - 브라질 최대의 관광도시 리우의 거대 예수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이과수(Foz do Iguazu) - 세계 3대 폭포라 불리는 이과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다.
쿠리치바(Curitiba) - 전 세계 건축/도시/교통/행정가들의 참조 도시, 쿠리치바를 답사한다.
관광을 목적으로 왔다면 무조건 1번 아니면 2번이 정답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 우리 회사와 전 직원을 대표하여 와 있고,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은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닐 터였다. 이미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출장 셋째 날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다 다음날 아침 쿠리치바로 출발하는 항공권을 구입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쿠리치바라는 도시 이름이 다소 생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인터넷에서 쿠리치바를 검색해보면 '한국 정치인·공무원이 가장 많이 찾는 브라질 도시' 같은 제목의 기사가 수두룩하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역대 서울시장 또한 모두 이곳을 다녀갔다. 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장과 도시정책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6, 7급 공무원들까지 연수로 이 도시를 찾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체 왜 이 먼 곳까지, 그것도 한국에서 직항 편조차 없는 쿠리치바까지 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영문 웹에서 조금 더 찾아보니 쿠리치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의 대부분의 현대 도시들은 쿠리치바를 벤치마킹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명실상부한 '전 세계의 참조 도시'인 셈이다.
쿠리치바는 상파울루 콩고냐스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파라나 주의 주도이며 2019년 기준 인구는 193만 명으로 우리나라 대구광역시(245만, 2020년 기준)와 대전광역시(152만, 2020년 기준)의 딱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쿠리치바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 시장이자 전 주지사, 도시계획가이자 행정가인 제이미 레르네르(Jaime Lerner, 1937-)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71년에 제70대 쿠리치바 시장이 된 그는 이후 제73대, 제76대 재임 이후 파라나 주지사까지 역임했다. 묘하게 시간 간격을 두고 공직을 이어나간 덕분에 사실상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거의 30년간 쿠리치바의 모든 것에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있고 TED 강연 등도 제법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시길. 그럼 그가 시장이 된 이후 지난 30년간 어떤 일들을 해왔기에 쿠리치바가 전 세계의 참조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진실은 늘 현장에 있다. 그리고 난 궁금하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쿠리치바가 국가, 학문, 산업을 막론하고 전 분야에서 다양하게 관심을 받아왔음은 자명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도시에 대한 교통공학 엔지니어들의 사랑만큼은 좀 각별하다. 간선급행버스체계(BRT: Bus Rapid Transit)란 간단히 말해서 '지상에서 버스를 지하철처럼 달리게 하자'는 취지의 대중교통 정책이다. '지하철처럼'이라는 말은 곧 버스 운행에 '정시성'과 '신속성'이 보장된다는 뜻이며 이를 위해선 중앙버스전용차로의 설치, 승하차시 시간 지연이 없는 정류장 모델, 노선 간 통합 운영체계 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쯤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그렇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적용된 중앙버스차로와 간선급행버스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정확히 쿠리치바의 BRT를 벤치마킹한 것이며 이명박 전 시장 시절에 완성되어 지금까지도 나름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정책이다. 그러고 보니 서두에서 이명박 전 시장도 쿠리치바를 다녀간 적이 있다고 했다. 이제야 퍼즐 조각이 짠 하고 맞춰지는 기분이다.
사실 서울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BRT 체계를 도입한 도시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그 모든 도시들은 100% 쿠리치바를 벤치마킹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쿠리치바는 이런 것들을 무려 1970년대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시가 버스 정책을 개편한 것이 2004년이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내 입장에서야 새삼스러울 정도로 익숙한 시스템이지만 우리나라 70년대에 BRT가 도입되었다고 상상해보면 얼마나 급진적이고도 과감한 정책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쿠리치바의 버스 시스템의 성공을 도운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튜브(tube) 정류장'과 '중앙버스차로'다. 독특한 외관의 이 버스 정류장은 레르네르 시장이 직접 디자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정류장 형태는 버스 승하차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어 정시성 확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승객들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쳐 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1 지하철 개찰구 형태의 문에서 요금 지불을 하고 정류장 내부로 들어간다.
2 비바람과 햇빛을 피하며 편안하게 버스를 기다린다.
3 버스가 도착하면 자동으로 나오는 발판을 통해 빠르고 안전하게 승차한다.
간단한 원리지만 버스 승하차시 시간 지체를 불러일으킬만한 아래의 몇 가지 요인을 완벽하게 차단한다.
1 요금을 미리 지불하기 때문에 승차 시 진입이 빠르다.
2 승강장과 버스 높이가 동일하여 교통약자 진출입이 빠르다.
3 버스 정차 위치가 정해져 있어 승객과 버스가 서로를 찾아 헤매는 일이 없다.
2020년 현재 서울의 버스체계와 비교해보자. 1번의 요금 지불방식은 우리나라도 이미 RFID 기반 교통카드 체계가 도입되어 동일한 효과가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서울이 더 진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2번과 3번이다. 이제는 서울도 상당수의 차량이 저상버스로 교체되었으나 그럼에도 승강장과 버스 바닥 사이에는 높이 차이가 존재한다. 참고로 쿠리치바의 튜브형 정류장의 진출입구에는 슬로프 또는 휠체어용 리프트가 개별적으로 설치되어있어 누구든 자유롭게 승강장 레벨로 올라갈 수 있다. 결정적인 차이는 3번인데 아직까지도 서울에서는 정류장에서 내가 타려는 버스를 찾아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인구 규모만으로 5배 이상 차이나는 두 도시이기에 완벽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중앙버스차로를 포함하는 다층형 도로체계 또한 쿠리치바의 인기 있는 벤치마킹 대상이자 BRT 시스템을 성공시킨 핵심 요소이다. 도시의 주요 거점들을 연결하는 이 도로 시스템은 아래와 같이 총 네 단계(위 단면도에선 세 단계까지만 표시되어있다)의 층위를 가지도록 설계되어있다.
1단계 중앙차로: BRT 시스템을 위한 버스전용차로
2단계 보조도로: 중앙차로 바로 옆에 붙어 일반차량 통행 처리
3단계 간선도로: 한 블록 뒤, 4차로 일방통행으로 설계되어 일반차량의 주요 통행량을 처리
4단계 이면도로: 간선도로 이후 안쪽 블록에서 도시조직 내부 세밀한 통행을 처리
물론 쿠리치바도 완벽히 새롭게 계획된 도시가 아니다 보니 4단계 시스템은 주요 도심 핵들을 연결하는 식으로 부분 적용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도로 폭을 도입하기 위해선 기존 도시조직의 철거와 정비가 불가피했을게 분명하다. 주민들을 향한 끊임없는 설득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미 반세기 전에 이러한 급진적인 버스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쿠리치바는 충분히 배울 점이 많은 도시이다.
버스 시스템이나 교통체계로 워낙 유명한 도시이다 보니 혹자는 쿠리치바가 자동차 중심의 조금은 삭막한 곳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사동이나 홍대는 물론이고 이제는 웬만한 중소도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걷고 싶은 거리' 또는 '차 없는 거리'의 원조도 사실은 쿠리치바에 있다. 일명 '꽃의 거리(Rua das Flores)'라 불리는 약 2km 정도의 보행자 전용 도로가 그것이다.
자가용 소유의 보편화와 함께 세계 많은 도시들이 자동차 중심의 도로확장과 지하철 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을 1970년대, 쿠리치바의 레르네르 시장은 과감히 버스 위주의 지상 대중교통 체계를 강화하여 차 없는 사람들의 편의성을 우선순위에 놓았다. '꽃의 거리'의 조성 또한 보행자가 걷기 편한 도시가 좋은 도시라는 소신에서 비롯된 급진적인 사업이었다. 직접 걸어본 '꽃의 거리'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조약돌로 예쁘게 포장된 바닥에는 색깔 돌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어 노점상이 들어설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하며 질서를 만들고 있었다. 3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넓은 길 양옆으로는 아케이드형 상점들이 들어서 있고 거리에는 벤치와 가로수 같은 공공시설물과 조경이 어우러져 편안한 풍경을 자아낸다.
처음 이 곳을 차 없는 거리로 선포한 당시에는 상권이 죽을 것이라는 상인들의 우려와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레르네르 시장은 그들을 설득하고 보행환경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차를 없애는 대신에 BRT를 통해 대중교통 체계를 강화한 덕분에 오히려 도시 곳곳에서 '꽃의 거리'로의 접근이 더욱 쉽고 빨라졌다. 상권은 예상과 달리 더욱 살아났고 전 세계 차 없는 거리의 원형이 된 '꽃의 거리'는 쿠리치바 시민들의 자랑이자 사랑받는 도시공간으로서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
쿠리치바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아라메 극장이다. 포르투갈어 아라메(Arame)는 영어로 'wire', 우리말로는 '줄'이다. 보통 공사현장에서 가설재로 많이 사용하는 지름 48.6mm짜리 강관을 다양한 방법으로 조합하여 멀리서 보면 '줄'을 엮어 만든 건물처럼 보이기에 붙은 이름이다. 사실은 상파울루로 돌아가는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방문을 망설였었다. 공항은 시내 남쪽이지만 아라메 극장은 북쪽 외곽에 위치하여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가보면 못내 후회할 것만 같아 우버를 잡아타고 드라이버를 재촉했다.
앞서 살펴본 버스 시스템과 꽃의 거리가 쿠리치바 시민들의 배려와 참여로 시 전체가 이득을 볼 수 있었던 사례라면 아라메 극장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다. 시민들을 위해 시에서 만들어 제공한 공공건축이기 때문이다. 본래 채석장으로 쓰이던 이곳은 광석이 모두 고갈되며 버려진 공간으로 오래 방치되어있었다. 레르네르 시장은 이 도시의 유휴공간을 놓치지 않고 지형적인 특성을 살려 물을 채우고 2,400석 규모의 대규모 공연장을 짓도록 했다.
공사는 단 2개월 만에 신속하게 완료되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게 빠른' 공사 속도다. 공연장이라는 기능에 충실하도록 평면 형태를 원형으로 단순화하고 값싸고 다루기 쉬운 재료인 강관(steel pipe)을 채택하여 공기(工期), 비용, 구조, 그리고 미(美) 모든 면에서 영리하게 활용했다. 자세히 보면 건축은 물론이고 객석 의자 같은 작은 부분까지도 강관이라는 재료적 이점을 극대화했다. 기둥 사이에 틈을 두어 커튼을 끼워두게 만든 건 누구의 재치였을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기발함마저 구석구석 녹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공건축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초기 사업구상 단계에서부터 예산확보, 의사결정, 시민사회와의 갈등, 지난한 행정절차 등 셀 수 없이 많은 난관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돈도 시간도 낭비됨은 물론이고 지어지는 과정에서 본래 취지가 변질되어 버리거나 완공될 즈음에는 그 필요성이나 의미가 퇴색는 경우도 많다. 아라메 극장은 그런 리스크(Risk)를 애초부터 시장 재량으로 배제해버렸다. 지난 30년 간 쿠리치바를 만든 지도자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물을 짓기도 전부터 불필요한 고민으로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일단 빠르게 지은 뒤 시민들이 직접 사용하면서 그 의미와 용도를 찾아가도록 했다. 실리보다는 실속을 택했고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내가 찾은 그날도 다음 공연 연습이 한참이었다. 객석에 앉아 잠시 경청해보는데 투명한 공연장 벽 너머로 보이는 암벽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더라. 세상 이보다 더 멋진 공연장이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궂은 날씨에도 이곳을 찾아 음악과 사람, 음식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의 표정 속에서 이 건축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만족도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토록 힙(hip)하고 멋진 문화공간을 쿠리치바 시민들은 '공공시설'로서 공짜로 누리고 있었다.
사실 쿠리치바는 위에서 언급한 것들 외에도 녹지면적, 생태계 보전, 쓰레기 처리와 자원 재활용 시스템 등 미래 도시의 주요한 가치와 관련된 부문에서 아직도 수많은 도시의 롤 모델로 건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루짜리 짧은 여행이라 더 많은 곳에 갈 수도, 볼 수도 없어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이도시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적어도 내가 나고자란 서울이라는 도시의 많은 것들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보고 만들어졌는지 그 뿌리를 알게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쿠리치바를 내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비로소 서울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또다른 시야가 열린 것만 같았다.
'꽃의 거리'에서 '아라메 극장'으로 이동을 위한 우버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시야에 들어온 택시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그러고 보니 이 택시 색깔이 서울의 그것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참고로 서울시는 지난 2015년 '서울색'을 공식 제정하고 모든 회사택시의 외관 색상을 '꽃담 황토색'으로 전격 채택한 바가 있다. 이 주홍빛 색상의 이름이 '서울 꽃담 황토색'인지, '쿠리치바 오렌지'인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다만 분명한 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이 도시에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보았고, 어쩌면 미래 또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