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파울루 미술관(MASP) 탐방기
불현듯 드니 빌 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Arrival, 2016)'가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도심 상공에 거대 괴 비행체와 함께 나타난 외계인들과 대화하는 영화 말이다. 마치 중력을 거부하기라도 한 듯, 도심 상공에서 유유히 부유하는 건물의 모습은 그런 상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만 영화에선 세로로 길었던 형태를 가로로 좀 눕히고 양 끝에 곤충의 다리같이 뻗어 나온 4개의 기둥을 달았다는 점 정도 차이가 있었달까. 상파울루 미술관(MASP, Museu de Arte de São Paulo)의 첫인상은 이처럼 지구인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경하고 이상했다.
이탈리아 태생의 브라질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 1914-1992)의 설계로 지난 1968년 완공된 이 미술관은 명실상부한 상파울루의 상징이다. 처음 이 건물에 대해 알게 된 건 정말이지 우연한 기회였다. 출장이 결정되기 두 달여 전에 참석했던 건축가 조민석 씨 강연 발표 슬라이드 한 장에 흑백으로 된 상파울루 미술관 사진이 있었다. 건축가는 본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2010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필로티 공간이 MASP와 닮았다는 언급을 하며, 본인도 아주 최근에서야 비로소 이곳에 가보았다는 너스레를 떠시고는 빠르게 슬라이드를 넘겼었다.
상파울루 출장이 결정되었던 바로 그 날, 잊고 있던 그때 그 사진이 떠올랐다. 당장 출장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황에서 '그 이상하게 생긴 미술관'은 자연스럽게 내가 아는 상파울루의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목적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레었다. 나와는 정말이지 아무런 상관없을 줄 알았던 한 건축물과 갑자기 깊은 인연이라도 맺어지는 느낌이 들었달까. 게다가 불과 몇 주 후면 직접 가볼 수도 있다. 영화 '컨택트'에서 루이스와 이안이 두려움과 호기심을 안고 처음 '셸'에 방문할 때의 심정이 꼭 이렇지 않았을까.
혹자는 MASP를 상파울루와 브라질은 물론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대표하는 미술관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오랜 역사와 상징성을 가지는 미술관이 바로 MASP였다. 더욱 멋진 건 이렇게 중요하고 대표적인 미술관이 상파울루의 중심대로 파울리스타(Av. Paulista) 한 복판에 위치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립 현대미술관이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 큰 길가에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대단한 위치 선정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출장지였던 한국문화원 역시 파울리스타 대로변에 있어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할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상파울루에서의 첫날 아침, 나는 계획했던 대로 곧장 이곳으로 향했다.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받치는 네 개의 빨간색 다리(기둥)는 과연 멀리서부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누르며 가까이 다가가자 제일 먼저 광활한 필로티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필로티는 기둥으로 받쳐진 건물 지상부에 생기는 외부공간을 말한다. 흔히 '빌라'라고 불리는 한국의 저층-밀집 주거 건축 유형에서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간 또한 필로티다. 하지만 MASP의 필로티는 여느 건물과는 확연히 달랐다. 중간에 기둥이 단 한 개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양 단부의 기둥으로만 받쳐진 필로티 스팬(span,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은 무려 74m다. 완공 당시 세계 최고길이었음은 물론이고 2020년인 지금 다시 보아도 충분히 인상적인 공간이다. 현대 건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메가 트러스(Mega truss, 거대 강구조물)가 아닌 순수 철근콘크리트 구조라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구조적으로 충분한 의의가 있는 건물이다. 다만 지어진지 어느덧 반 세기가 넘었다 보니 중앙부에 장기 처짐이 관측된다. 멀쩡히 영업을 하고 있으므로 안전 측면에서 별 문제는 없겠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알아채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나이가 들면 배가 나오듯,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 같은 게 아닐까.
내가 찾아간 평일 오전 필로티는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다. 해가 좋은 쪽으로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는 젊은이와, 무장한 채 순찰을 도는 경찰, 그리고 비둘기 한 무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 공간의 진면목은 매주 일요일마다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파울리스타 대로는 매주 일요일이면 교통을 통제하고 그 자체로 거대한 보행자 거리이자 시장, 거리공연의 메카로 변신한다. 마치 우리나라 대학로가 옛날에 그랬듯 말이다. 그때마다 대로 한 중간에 위치한 MASP의 거대한 필로티 공간에는 거대한 벼룩시장이 열린다고 한다. 비록 출장기간 중 일요일이 없어 그 모습을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광장을 가득 메울 활기와 생동감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필로티 한편에 마련된 매표소에서 40 헤알짜리 표를 사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마치 만화영화에서 UFO의 바닥 한쪽이 열리고 쑤욱 내려오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듯, 입장하는 방법 또한 제법 멋지다. 상부 건물은 총 두 개 층으로 되어있어 그중 상부층이 상설전시 영역, 하부층이 사무지원 영역이다. 카페, 기념품점, 기획전시실, 화장실 등 편의시설은 모두 필로티 하부 지하에 마련되어있다. 사실상 상설전시가 열리는 최상부 한 개층이 이 미술관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당장 그곳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계단을 따라 올라오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공간감이 나를 압도했다. 필로티 스팬과 동일한 장변 74m의 긴 직사각 공간 전체가 벽이나 기둥 따위의 구획이 없는 '통 공간'이다. 요즘이야 이 정도 무주(無柱) 공간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지만 다시금 이 건물이 1947년 착공, 1968년 완공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공간뿐 아니라 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의 수준 또한 대단했다. 고흐, 피카소, 모딜리아니, 모네, 마네, 벨라스케스... 시대별 거장의 작품이 수두룩 함은 물론이고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도 다수여서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알아볼 법 한 작품이 여럿 있었다.
공간만큼이나 전시 방식 또한 흥미롭다.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마다 사람 키보다 높은 유리판이 엽서처럼 제각각 꽂혀있다. 그림은 이 유리판을 전시장 벽 삼아 하나씩 걸려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큰 공간에 그림만 동동 떠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앞서 필로티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이 건물에는 중간 기둥이 하나도 없는 바람에 전시실 전체는 마치 거대한 빈 공간에 그림만 부유하고 있는 '그림의 숲' 같았고 관람객은 그 숲의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산책하듯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꿈만 같은 공간이 아닐는지. 당연히 전시실에는 정해진 관람동선도, 길을 막는 벽이나 기둥도 없어 완벽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경험인가!
유일한 규칙이 있다면 모든 그림 앞뒤가 모두 한 방향으로 정돈되어있다는 점 정도. 게다가 그림이 걸린 쪽 유리판에는 그 어떤 설명이나 글씨도 없다. 대신 모든 설명은 액자 뒷면에 영어와 포르투갈어로 자세히 쓰여있다. 액자가 걸린 벽이 투명해서 가능한 방법이다. 이렇다 보니 순수하게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은 관람객은 앞 면만 보면서 걸어 다니면 된다. 작품마다 상세한 설명이 읽고 싶은 사람은 살포시 뒤로 돌아가 서서 읽으면 되니 서로 동선도 겹치지 않고 각자 호흡대로 작품을 즐길 수 있다.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관람방식이 아닐 수 없다.
비슷한 전시 방식을 예전에 SANAA 루브르 박물관 별관동 계획안에선가 본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도면만 보고 공간을 상상하며 참 괜찮겠다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실제 실현된 공간에서 체험해보니 상상 이상으로 마음에 쏙 들었다. 나의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막연한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상파울루에서 보고, 만나고, 체험한 것 중에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새롭고 좋은게 유난히 많았다. 그날따라 선생님과 함께 온 아이들이 참 많았는데 어찌나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른다. 어쩜 저렇게 집 앞 놀이터 가듯이 찾아올 수 있는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답을 알게 되었다.
미술관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다. 얇디얇은 유리창 한 장을 사이에 두고서, 한쪽으로는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중심가 파울리스타 대로를 분주히 달리는 차와 사람이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역사와 시대를 대표하는 회화의 '숲'이 펼쳐져 있다. 무려 반세기도 전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당시 브라질 사람들의 일상과 예술의 거리는 고작 1cm 남짓한 유리창 한 장에 불과했더라.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이 북촌의 골목길로 옮겨온 게 불과 7년 전 임을 생각해볼 때 이 한 장의 사진은 나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연하게 마주쳤던 한 장의 사진 속 MASP는 분명 독특한 구조에서 비롯된 외관 때문에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결국 이렇게 직접 찾아오게 까지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곳을 떠나며 끝내 남은 인상 한 가지는 거대한 스팬도, 필로티도, 무주공간도 아닌 바로 유리창 너머로 느껴지는 '예술과 일상의 거리'와 아주 조금의 부러움 정도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