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리치바의 고기도 모조리 먹어 치우다
만약 브라질에서 단 한 접시의 음식만이 허락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슈하스코를 택하리라. 이과수 폭포에서 들어보는 웅장한 물소리도 좋고 브라질리아에서 국민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선생의 작품을 만나도 멋지겠지만 나에게 있어 맛보다 더 강렬한 자극은 없다. 고기, 고기가 먹고 싶었다.
출국을 앞두고 이런저런 준비로 한창이던 어느 날, 옆자리 신입사원이 내게 쪽지를 슬쩍 내밀었다. 상파울루에서 살다온 친구가 추천해준 맛집 리스트라고 했다. 총 세 곳의 레스토랑 이름이 적혀있는데 한식집 한 곳과 슈하스카리아 두 곳이었다. 그 친구는 한식집을 일 순위로 추천했다지만 짧은 출장 일정 중에 한국 음식이 생각나진 않을 것 같아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다른 한 곳의 슈하스카리아는 내가 묵을 호텔에서 너무 멀었다. 결국 딱 한 곳이 남았다. 바로 슈하스카리아 '포구지셩(Fogo de Chão)'이다.
슈하스코(Currasco, 또는 슈하스쿠, 추라스코)는 브라질 남부에서 기원한 라틴아메리카식 육류 꼬치구이를 총칭하고 슈하스카리아(Churrascaria)는 슈하스코를 파는 가게를 뜻한다. 포구지셩은 상파울루에만 세 곳의 분점을 두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진출한 대중적인 슈하스카리아다. 가게 이름을 직역하면 '땅의 불'이다. 보통 슈하스카리아는 직화로 고기를 구워내기 때문에 가게 이름에 포구(Fogo, 불)가 붙는 경우가 많다.
30시간의 긴 비행 끝에 상파울루에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여독과 시차에 시달리며 간신히 호텔방에 도착해 자정 무렵에서야 짐을 풀었다. 미리 준비해 온 컵라면 하나로 간신히 허기만 달래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저녁, 나는 너무나 당연히도 슈하스카리아로 향했다. 이 한 끼의 만찬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참았던가!
추천받은 포구지셩 하르딘(Jardin) 지점은 파울리스타 대로에서부터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유명한 상파울루 미술관(MASP)에서도 꽤 가까운 편이다. 특히나 이 지역 일대는 일명 상파울루의 청담동이라고 불린다는데... 고기를 먹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변 풍경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여섯 시가 조금 못되어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브라질 사람들은 보통 저녁식사를 늦게 시작하는 편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내 배꼽시계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했다.
혹시나 영업시간 전일까 쭈뼛쭈뼛 문 앞에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들어갔다. 꽤 넓고 세련된 인테리어에 우선 놀랐다. 불에 구운 고기를 파는 가게래서 어딘가 수더분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손님이 겨우 한두 테이블 정도였지만 이내 손님들로 가득 들어찼다. 눈대중으로만 훑어봐도 테이블 수가 50개도 넘는 규모 있는 식당이었다.
일찍 온 덕분인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더 이상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창한 영어와 농익은 매너가 인상적이던 전담 웨이터가 자리를 안내했다. 테이블엔 기본적으로 앞접시와 포크, 나이프가 놓여있고 감자튀김과 빵이 제공된다. 물론 고기를 먹을 배를 아껴놓아야 했기에 손 대지는 않았다. 독특했던 건 옆 자리 의자에 올려놓은 내 가방에 천 보자기를 예쁘게 덮어주는 행동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브라질에선 소매치기가 극성이라서 중요한 소지품은 보이지 않게 가려놓는 것이 기본이란다. 맞다, 견물생심인 법이다. 하지만 나름 고급스러운 식당에서조차 그렇게 하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자리를 안내받고 나서부터는 자유롭게 샐러드바 이용이 가능하다. 한 바퀴 휘 둘러보니 생각보다 종류도, 양도 어마어마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신기한 생김새의 식재료들도 많았는데, 모르는 건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웨이터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눈길조차 줄 여유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물밀듯이 계속해서 서빙되는 고기를 해치우느라 한눈팔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슈하스코는 무한리필이 기본이다. 그 방식이 참 재미있는데 자기 테이블에 놓인 원형의 딱지를 초록색 면이 보이게 두면 '나에게 고기를 계속해서 가져다주시오'라는 뜻이다. 저 멀리서도 보이는 모양인지 뒤집기가 무섭게 웨이터들이 줄줄이 부위별로 고기를 들고 내 앞으로 온다.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가져다주는데 대략 30초마다 한 명씩 말을 걸더라. 계속해서 접시 위에 쌓여가는 고기를 채 먹지 못해서 조급해졌을 때는 슬며시 딱지를 뒤집어 놓으면 그만이다.
다시 배가 고파지면 어떻게 하냐구? 간단하다. 다시 초록색이 보이게 뒤집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기를 들고 사람들이 걸어온다. 언제까지? 당신이 항복할 때까지!
멀쑥하게 잘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그 모양새가 참으로 재미있다. 한 손에는 얼핏 롱소드처럼 보이는 거대한 고기 꼬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마치 아기 안아주듯 접시를 받쳐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이윽고 내 앞에 도착해서는 낮고, 굵고, 짧은 목소리로 '초리쏘?(Chorizo, 등심)' 하는 식으로 가져온 고기의 부위명에 말 끝을 올려 나의 의사를 묻는다. 먹을지 말지는 순전히 나의 선택이다. 그저 말로, 눈으로, 손으로, 혹은 몸짓으로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먹겠다고 하면 보는 앞에서 커다란 칼로 먹음직스럽게 한 조각 썰어서 접시에 놓아주고 유유히 사라진다. 혹, 먹지 않겠다고 하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다른 손님에게 가거나 주방으로 되돌아간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같은 웨이터가 또 다른 부위를 들고 와 당신에게 똑같이 말을 걸어올 테니 말이다. '필레 미뇽(안심)?'
다소 이른 시간이었던 식사 초반에는 손님이 나 하나뿐이다 보니 문자 그대로 '숨 돌릴 틈 없이' 내 앞으로 웨이터들이 찾아왔다. 처음엔 모조리 맛보고 싶어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골라서 먹게 되었다. 대부분 사진을 찍긴 했는데 어떤 사진이 어느 부위인지 잘 기억도 안 나고... 진짜 정신을 잃고 먹느라 바빴다.
브라질의 슈하스코에 대해 조금만 검색하다 보면 '삐까냐(Picanha)'라는 부위가 자주 등장한다. 한국으로 치면 우둔살에 해당하는 부위다. 다만 브라질에서는 손질하는 방법이 조금 달라서 한국에서 맛보는 식감과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마치 거대한 캐슈너트 모양으로 꼬챙이에 끼워진 독특한 외형 때문에 굳이 이름을 듣지 않아도 삐까냐가 온 것을 금방 알아챘다. 맛은? 기대보다는 못했다. 육즙은 풍부했지만 지방이 별로 없는 부위라 전형적인 한국식 소고기 입맛인 나에겐 그저 그랬다. 육류가 싸고 풍부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마블링이 있는 소고기보다는 살결이 튼실하고 씹는 맛이 좋은 부위를 더 선호한다고 했다. 그래서 삐까냐가 인기인 모양이다.
식사가 중반에 이르렀을 무렵, 특별히 주방으로 초대받았다. 고기와 음식에 대한 설명을 귀담아듣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특별히 고기를 굽는 전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웨이터를 따라 들어간 주방에선 거대한 화로 안 온갖 종류의 고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구워지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글지글 거리는 소리도 압권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숯불 화로를 사용하고 그 옆의 가스 화로는 손님이 정말 많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물론 가스 화로는 어디까지나 조리 시간을 줄이기 위한 초벌까지 뿐이고 서빙 직전에는 100% 숯불에서 굽는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알고 먹으니 더 맛있었다. 거대한 화로 속에서 소, 돼지, 양 가릴 것 없이 야성적으로 구워지는 풍경은 나에게 있어 이번 출장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한 스무 종류의 고기를 먹은 듯싶었다. 샐러드바에 손도 대지 못했던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끝내 백기를 들고 빨간색으로 딱지를 돌려놓는 나에게, 웨이터는 왜 벌써 포기하냐며 살짝 승부욕을 자극했다. 하지만 내 배에는 조금의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물론 고기배와 디저트배는 별개다. 기름진 고기 뒤에 맛보는 달콤한 크림 블뤠와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과도 같은 맛이었다. 완벽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분명했다.
무한 리필되는 슈하스코의 1인분 가격은 152 헤알, 한화로 약 4만 5천 원 정도 된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가격이긴 한데 함께 곁들인 음료와 후식 값을 더하고 전담 웨이터에게 주는 팁까지 다 하니 도합 287 헤알, 거의 두 배가 되었다. 그래 봐야 10만 원이 채 못 되는 가격이다. 내가 느낀 만족도에 비하면 되려 값을 싸게 치른 느낌마저 들었다. 그날 밤은 아주 배까지 두들겨가며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첫날 맛봤던 슈하스코의 여운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그래서 쿠리치바에 들렀던 날 다시 한번 슈하스카리아를 찾았다.
쿠리치바에는 미리 알아둔 맛집도 없고 검색되는 정보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럴 때 유용한 게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 앱이다. 대개 한국어 웹에서 맛집이라고 올려놓는 레스토랑들은 생각보다 그저 그런 경우가 많았다. 대신 영어 사용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순위가 높은 집을 가면 실패하는 확률이 현저히 줄어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입맛을 기준으로 한 주관적인 평가다.
앞서 소개한 상파울루 포구지셩은 트립어드바이저 앱 상에서 상파울루 내 수천 개 슈하스카리아 중 2위로 랭크된 압도적인 맛집이었다. 쿠리치바에서도 트립어드바이저를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쿠리치바의 슈하스카리아 중 1위로 추천해주는 집을 찾았다. 거리는 조금 멀었지만 당장 우버 앱을 켜 포구 포르테(Fogo Forte)를 목적지로 넣었다.
앞선 일정에서 시간을 너무 오래 끄는 바람에 이미 시간은 두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구글에 따르면 이 레스토랑의 점심 영업시간은 오후 세시까지라고 되어있었다.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우버에서 내려 마주한 포구 포르테의 외관은 어딘가 다분히 한국적이었다. 넓은 대지에 옥외 주차장을 두고 단층으로 지어진 드라이비트 건물, OO가든 혹은 OO면옥이어야만 할 것 같은 묘한 분위기였다. 과연 이 집은 맛이 있을까? 내가 제대로 찾아온 걸까?
혹시나 브레이크 타임이 임박해 눈치 보며 식사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장내는 만원이었다. 동네 결혼식이나 시골 잔치에 온 것처럼 귀가 따가울 정도의 말소리와 고기 냄새와 뒤섞여서 대단한 활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참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팠다. 상파울루에서 한 번 먹어봤으니 주저할 것도 없었다. 일단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가방을 보자기로 씌우고 고기, 고기부터 찾았다. 가우초 양반, 이쪽이오!
확실히 쿠리치바가 상파울루보다 작은 도시라 그런 건지 훈훈한 시골 인심 같은 게 느껴졌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웨이터들이 잘라주는 고기 조각 또한 상파울루 보다 더 큼직하니 먹음직스러웠다. 맛도 좀 더 야생에 가까운(?) 입에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달까. 이 집에는 상파울루 포구지셩에서 봤던 딱지 같은 개념이 없다. 그냥 일단 웨이터가 오면 먹을지, 말지 말해주면 된다. 웨이터들은 당신이 얼마나 배부른지는 전혀 관계없이 정말 끊임없이, 끝도 없이 고기를 들고 앞에 나타나 말을 건넨다. 먹을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먹고, 또 먹었다. 그대들의 이름(부위)을 하나하나 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시오.
오로지 고기만 줄곧 먹어치우는 나에게 코미디언 배영만을 쏙 빼닮은 사장님께선 샐러드바를 가리키며 윙크를 날리셨다. 물론 평소엔 쌈도 잘 싸 먹고 가니쉬도 곁들이는 편이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적어도 여기서 만큼은 고기만 먹고 싶었다.
상파울루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삐까냐(Picanha, 우둔살)에도 다시 한번 도전했다. 앞서 설명했듯 거대한 캐슈너트 모양으로 먹음직스럽게 꽂혀있는 모양새만큼은 만점짜리다. 맛은 지난번보다 괜찮았다. 지방이 많지는 않지만 육질이 쫄깃하고 고기 결이 살아있어서 치아에 탄력 있게 저항하는 식감이 아주 일품이었다. 다음에 한 번 더 먹는다면 그 진가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접시에 받았던 고기를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미안한 생각에 퍽퍽한 살코기만 남기고 어떻게든 먹어보려 했는데 그릇을 치워가시는 사장님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아니 왜 이것밖에 먹질 못하냐며, 아직 시간은 많으니 더 먹어보라며 또 한 번 나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백기를 들었다.
마지막 남은 디저트 배를 짜내어 다시 한번 황홀한 마무리를 노려보았다. 이 집은 고기만 유명한 게 아니라 디저트도 유명하다며 자신 있게 메뉴를 선보이시는 사장님이었다. '디저트 맨'이라고 전담하는 셰프가 따로 있을 정도라고 했다.
크림 블뤠 만큼이나 내가 참 사랑하는 초콜릿 무스를 주문했다. 너무 느끼하지도, 또 너무 밍밍하지도 않은 적절한 점도와 당도가 그야말로 슈하스코 먹고 입에 남은 기름기를 싹 흡수해 정리해주는 맛이었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샷을 식도에 흘려보내고 나서야 긴 식사가 끝이 났다. 참으로 멋진 한 끼였다.
어느덧 시간은 네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고기를 먹는데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들어올 때 내 주변으로 왁자지껄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나고 없었다. 그제야 구석에서 점심 식사를 급하게 하시는 사장님 내외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장님은 스마트폰 충전을 요청하는 나에게 얼마든지 더 있다가 가도 좋다며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두 도시에서의 맛 본 두 번의 슈하스코, 사실 이게 이번 브라질 출장기의 요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장에서 돌아온 지금 내가 기억하는 브라질의 추억은 사진도, 음악도, 냄새도 아닌 맛이기 때문이다.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입천장이 벗겨질 것만 같았던 강렬한 소금의 맛과 혀를 델 것만 같이 줄줄 흘러내리던 뜨거운 육즙의 향연, 나의 브라질은 그 한입 안에 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