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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Sep 03. 2020

외로운 백조와 장미

이탈리아 알타비아(Alta Via 1) 트래킹 - 마지막 날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희뿌연 연무(煙霧) 뿐이었다. 온데 사방이 구름으로 둘러싸인 누볼라우 산장의 아침 풍경은 마치 내가 하늘 위를 걷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어로 구름(Nuvolau)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따뜻한 물은커녕 샤워실도 변변히 없고, 전기 콘센트라도 한번 쓸라치면 줄을 서야 하는 불편한 곳이지만 지난밤 이곳에서 나는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라(Mara)와 소피아(Sofia)와 헤어진 뒤, 이 산장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호주인 부부와 친해진 까닭이었다. 선생님으로 일하며 방학 때마다 전 세계를 함께 여행한다는 둘은 저녁식사 내내 나와 함께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언젠가 호주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또 연락처를 교환했다. 나는 분명 혼자 걸었지만 길 위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 했다.


산장의 아침,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모를 초현실적인 풍경
이곳에선 길 조차 구름 속을 따라 걷는다.


 다음날 아침 일찍, 부부는 다시 길을 나섰다. 한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구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에는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없어 보였다. 벌써 수많은 나라를 함께 여행했다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결혼이라는 사회적인 약속 그 이상의 어떤 '신뢰' 같은걸 느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기에 앞이 보이지 않는 길조차 이들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 나는 둘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서도 한참을 더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이제는 길 위를 떠나야 할 시간...


 '알타비아 1'을 따라가려면 남쪽으로 파소 팔짜레고(Passo Falzarego)를 향해 계속 걸어야만 한다. 완주까지는 못해도 사나흘은 더 걸어야 할 거리다. 하지만 나의 휴가 일정은 하루 뒤면 끝이 난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밀라노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오늘 안에는 이 산에서 내려가야만 한다.


 익숙해질 즈음이면 이별이라더니 정말 그 말이 딱 맞다. 애초에 예정되었던 일정이라곤 해도 아쉬운 마음까지 숨길수는 없는 법이다. 남쪽으로 알타비아를 계속 걷는 길과, 동쪽으로 산을 내려가는 길의 이정표 앞에 섰을 땐 정말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눈 딱 감고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 Ampezzo)로 향하는 방향이다.


이제 저 익숙한 표식과도 안녕이다.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산을 내려가는 길
마을이 가까워지는 모양인지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산 아래에서 곤돌라를 이용해 산장으로 짐을 실어 보낸다.
여기서도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친다.


 루트를 빠져나오자 나흘 내내 열심히 따라다니던 빨간색, 흰색 두 줄의 표식들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하산하는 길은 산장이 있던 해발 2,400m에서부터 담페초가 있는 해발 1,200m까지 쭉 내리막만 걷는  쉬운 코스다. 하지만 산은 원래 오를 때 보다 내려갈 때 더 위험한 법이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길 '위'에서는 몰랐는데 길 '옆'으로 벗어나니 안보이던 풍경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곤돌라를 태워 산장으로 짐을 보내는 할아버지, 등산회(?) 같은 곳에서 단체로 찾아온 아저씨들, MTB로 속도를 즐기는 청년까지.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이 산에서 저마다의 삶과 행복을 찾고 있었다. 요즘같이 코로나로 전 세계의 발이 묶여버린 상황에서 더욱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참으로 평온하고 자유로운 모습들이다.


도시를 발견했다!
코르티나 담페초 외곽의 민가들


 내리막이 끝나고 발목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질 즈음, 눈앞에 집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 Ampezzo)다.


 사실 인구 6천 명이 채 안 되는 이 작은 마을을 '도시'라고 불러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흘 만에 다시 마주한 '문명'의 풍경이 제법 생경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코르티나 담페초는 일명 돌로미티의 '동쪽 관문'으로서 스키나 보드 같은 겨울 스포츠는 물론이고 등산, 자전거, 하이킹 등 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액티비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이다. 이래 봬도 1956년 동계올림픽 개최지이자 2026년 동계올림픽 개최 예정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좀 생소한 이름이지만 몇 년 뒤에는 매스컴에서 심심찮게 듣게 될 게다. 


전형적인 이 지역 양식의 가옥
집집마다 내놓고 기르는 꽃들이 참으로 인상 깊다.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민가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돌로미티 지역의 집들은 목재를 주요 구조와 외장재로 사용하는데 특히나 외형적으로 두드러지는 넓고 반듯한 경사의 지붕과 돌출된 테라스가 특징이다. 인상적인 건 모든 집들이 저마다 테라스에 꽃나무나 화분을 두고 기른다는 점이다. 검색해본 바로는 길을 다니는 행인들을 위하는 배려 차원에서 기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멋진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이 지역의 호텔 또한 비슷한 외관을 하고 있다. 훗날 돌로미티에서 숙박할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보이는 대표 사진들마다 걸린 형형색색의 꽃나무를 보고 숙소를 고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코르티나 담페초의 풍경


중심가는 제법 관광도시 혹은 휴양도시 느낌이 물씬 난다. 
안젤로 디보나, 돌로미티 지역을 개척한 전설적인 등산가라고 한다.
관광지답게 아기자기 다양한 기념품들도 많다.


 코르티나 담페초의 중심거리는 작지만 번화했고, 깨끗하면서도 정돈되어 있었다. 신기했던 건 이곳이 동계 올림픽을 열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어떤 시설이나 건물,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알고 보니 코르티나 담페초는 올림픽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나 과도한 건축 등을 지양하기 위해 도시 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1956년이면 벌써 반세기도 전인데 상당히 생각이 앞서있던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평창에서도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며 이곳의 사례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종목별 경기장을 분산해 주변 도시의 기존 시설을 이용하고, 개막식장을 가변 구조로 해서 폐막후에는 객석의 규모를 줄이고, 숙소동을 Pre-fab 공법으로 지어 해체하는 등의 노력들이 다 코르티나 담페초의 선례에서 계승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 이 식당 분위기가 제법 괜찮군요?
일단 와인으로 입맛을 돋우고...
... 고기, 역시 고기가 최고지!


 코르티나 담페초 시내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건 곧 나의 트래킹이 모두 끝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비록 일정상 완주하지는 못했어도 혼자서 나흘간 70km의 산악 트래킹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에 스스로 조금 벅찼던 것 같다.

 

 모든 일의 끝맺음은 논공행상이 있어야 하는 법. 나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 위해 미리 점찍어둔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로즈마리를 곁들인 최상급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와 하우스 와인을 시켜 만찬을 거행했다. 메뉴판의 가격을 볼 땐 살짝 망설인 게 사실이지만 막 구워져 나온 고기를 한점 베어 무는 순간 망설임은 곧 탁월함으로 바뀌었다.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해치웠다.


이젠 그만 걷고 문명의 이기를 좀 이용해보련다.


 트래킹의 종착지를 코르티나 담페초로 잡은 까닭은 버스 때문이었다. 비록 이곳에서 밀라노로 향하는 기차 편은 없지만 대신 돌로미티 전역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기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트래킹을 출발하기 전 머물렀던 도비아코(Dobiacco) 숙소에 내 캐리어가 맡겨져 있다.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정도면 쉽게 돌아갈 수 있다.


 산길을 둘러둘러 도비아코로 돌아가는 길, 그간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모양인지 창에 기대어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함께 탄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나에겐 정말이지 꿀맛 같은 단잠이었다. 흥건하게 침을 흘리려던 찰나 잠에서 깨어나 다행히 정류장을 지나치는 불상사는 없었다.


장미 덩굴이 아름답던 도비아코의 호텔
방에서도 창문만 열면 대 자연이 코앞인 곳이었다.


 길을 떠나기 전에 들렀던  호텔 로젠가르텐(Hotel Rosengarten)으로 돌아왔다. 주인장은 맡겨두었던 캐리어를 돌려주며 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웰컴 드링크(welcome drink)를 선사했다. '장미의 정원(Rose garden)'이라는 이름처럼 여기저기 장미 덩굴이 예쁘게 피어있는 참으로 멋진 호텔이었다. 


 정원에 앉아 고개를 들면 알타비아의 험준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저 험준한 산봉우리 어딘가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가 않았다. 다만 지금 이곳은 그저 평화롭고, 조용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돌로미티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지난 나흘간의 여독을 풀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인 곳이다.


방안에는 이렇게 아담한 책상과 의자가...
... 푹신한 침대는 물론이고
... 백조와 장미도... 응?


 체크인을 마치고 방문을 열자 정갈하게 개어진 이불 위에 수줍은 백조 두 마리와 장미가 나를 반겼다. 이 예상치 못한 로맨틱한 풍경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잊고 있던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친구, 동료, 룸메이트, 같은 방향으로 걷던 이들, 반대 뱡향으로 걷던 이들, 주방장, 산장 주인, 자전거 타는 사람들, 소, 닭, 양... 하지만 지금 다시 나는 혼자다. 갑자기 또 엄청나게 외로워졌다.


외로운 마음은 밥으로 달래는 수밖에...
오늘은 깜짝 생일 이벤트가 있단다.
갑작스럽지만 다들 한 마음으로 축하의 뜻을 전했다.
이건 생일 맞은 분이 쏘는 특별 디저트!


 그날 저녁 식사도 제법 성대했다. 마지막 하루는 밖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어 저녁 식사도 숙소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하기로 했다. 미리 코스요리를 예약해두고 시간 맞춰 내려가니 내 옆으로 서너 테이블이 더 있었다. 재미있는 건 다들 머리 희끗한 노부부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휴양차 여유를 찾아 이곳 도비아코를 찾은 사람들 같았다.

 

 저녁 메뉴는 멜론과 하몬, 그리고 감자튀김을 곁들인 토끼고기구이였다. 제법 솜씨가 괜찮아 맛있게 식사를 마쳐가던 무렵 주방 쪽이 시끌시끌해졌다. 레스토랑 손님 중에 오늘 생일을 맞은 사람이 있어 깜짝 파티를 여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불꽃놀이가 들려있었고 이름도, 국적도 모르는 우리들은 그저 한데 모여 각자의 언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분위기를 만끽했다.

 

외로운 마음에 트램펄린도 혼자 뛰어보고...
... 책도 읽어봤다.


 식사를 다 마쳤음에도 밖은 아직 밝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정원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밀라노에서의 출장은 내내 시간에 쫓기며 현장을 오가느라 분주했었다. 그리고 곧바로 이곳 돌로미티에 와서는 다시 나흘을 내리 앞만 보고 산속을 걸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제야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에 잠기고, 두 볼에 스치는 바람의 감촉을 비로소 느껴보고 있었다. 어쩌면 나의 진짜 휴가는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일지도 모르겠다.


 내일 아침, 밀라노로 떠나기 전, 말러의 오두막에 잠시 들릴 생각이다. 휴가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괜찮은 장소일 것만 같았다.




알타비아 넷째 날, 트래킹 로그(Rif. Nuvolau-Cor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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