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a yoon Oct 02. 2022

여행처럼 머물렀던 집에 대한 기록

1년 9개월 동안 살았던 월세집에 대한 기록

이렇게 빨리 이곳을 떠날 줄 몰랐다. 부동산에 집을 내어 놓고서야 피부에 와닿는 현실에 마음만 분주해졌다. 그러면서 내가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다다랗고, 사계절만큼이나 다채로웠던 이 집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내가 살 집을 알아볼 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었던 건 아이들의 학교 문제였다. 통학거리가 가까워야 했다. 그래야 직업인으로 살면서 육아에 허덕이는 엄마의 역할에서 조금이라도 그 짐을 줄일 수 있었다. 지금의 집도 초등학교 바로 옆이고, 중학교 진학을 하더라도 걸어서 10분 거리에 통학이 가능했다. 그다음 역세권, 대단지,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동네라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다만, 아파트의 연식이 오래된 것 빼고는 다 맘에 들었다. 여유만 된다면 투자 목적으로 사 두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입지 조건이다.


그동안 살았던 집들은 다 고층이었던 반면, 이곳은 2층이라 새로운 경험이었다. 창 밖 뷰에 대한 로망은 없지만, 저층에 대한 선입견이 자리하고 있어 약간의 거리낌이 있던 참이었다. 외부 시선에 대한 직접적인 노출을 피해 블라인드를 내리고 있는 날이 많지만, 계단을 이용해 빠르게 주차장으로 이동 가능하고 집을 나서면서 항상 재활용 쓰레기를 가지고 나가 버리기 때문에 집에 쓰레기 쌓일 일이 없다는 좋은 점도 있다. 다만, 여름날 놀이터에서 밤늦게까지 삼삼오오 무리 지어 떠드는 소음에 괴로운 일들이 종종 있었다. 저층도 살아보니 나름대로 땅의 기운이 느껴지는 안정감이 좋았다.


계단식 아파트에 비해 복도식이라 이웃들과 마주치는 순간들이 많지 않을까 살짝 그 부분도 신경 쓰였다. 이사 와서 다시 이사를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옆집사람들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의외로 복도에서 이웃을 마주치는 순간이 적어서 놀랬다. 낯가림이 심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다.


아파트의 나이만큼이나 세월에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의 나무들이 울창하다.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나무들이 주는 웅장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가던 길을 멈출 때가 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반질반질하게 윤기 나는 관리 덕분에 시간의 나이테가 고즈넉하다


입지의 강점은 다른 모든 불편한 요소들을 잊게 해 준다. 약속이 있는 날은 지하철로 움직이고, 집 앞에 은행, 우체국, 병원, 학원, 음식점, 시장, 도서관등의 편의시설이 훌륭하다. 게다가 천을 따라 산책로, 등산로까지 있어 나이 들어 살고 싶은 동네의 배후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시골의 전원주택에 사는 게 로망이었다. 하지만 경험 많은 어르신들을 주변에서 보면서 궤도가 바뀌었다. 노후의 생활은 무조건 교통 편리하고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동네에서 사는 걸로 말이다. 주변에 산책로가 잘 되어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처음 이 집을 보고 바로 맘에 들었던 건, 욕실 리모델링이 되고 처음 입주였다. 베란다 새시를 제외하고 시간을 두고 계속 리모델링을 해 온 집이어서 관리 상태가 아파트 연식에 비해 좋았다. 오래된 아파트의 냉난방 취약은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야 하는 부분 인것 같다. 새시가 그 옛날 알루미늄으로 된 얇디얇은 창이라 바람 부는 날 밤 덜컹거리는 소리에 밤잠 설치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영하로 온도가 떨어지는 날이면 보일러가 터질까, 행여 세탁기 물 호스가 동파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도 말이다.


오래된 아파트로의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반드시 체크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보일러 작동의 이상 유무와 누수 문제다. 짧은 기간 동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경험해야 했다. 찜찜했던 10년도 더 된 보일러가 기어코 문제를 일으켰다. 온수를 틀었을 때 온도가 올라가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집주인에게 내심 보일러를 교체해 줬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전화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고쳐서 쓰자였다. 그렇게 10만 원가량 들여 수리를 받고 다행히 아직까지 다른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다. 언제 또 고장 날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야 하는 고충은 세입자의 몫이다. 예민함이라곤 1도 없는 곰 스타일인데, 밤사이 욕실 타일에 묻어 나는 물기를 이상히 여겨 욕실 천장을 불빛 비춰 추적한 결과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먼저 집주인에게 누수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관리실과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 원인 파악에 들어갔다. 욕실 천장을 뜯어내자 그동안 미세하게 배수관에서 누수된 고인물이 와락 쏟아졌다. (오 맙소사...) 인테리어 하자인 줄 알았는데, 원인 결과 윗집 배관 노후로 누수가 발생해서 수리비는 안타깝게도 윗집에서 부담해야 했다. 이래저래 수리하는 동안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고, 그 후로도 욕실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후유증이 생겼다.




20평에 큰방, 작은방, 거실, 주방, 욕실의 구조다. 베란다에 세탁기와 건조대를 놓을 수 있고 붙박이 창고도 있다. 이사 다니면서 워낙 짐을 많이 줄여 놓은 상태라 다행히도 공간의 부족함은 없다. 우리 집에는 없는 것들이 많다. 소파도 TV도 없다. 큼지막한 가구들도 없다. 가구라면 침대, 식탁, 책장이 전부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책장을 처분하려 맘먹고 책을 비워내고 있다. 최소한의 살림을 꾸리는 건, 일상의 여유와 공간 이동의 자유를 가져다준다. 이제는 이사가 두렵지 않다. 어디든 가볍게 떠날 수 있게 한결 라이트 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행하듯 살다가는 이 집에 대한 기억들도 소중하게 간직하련다. 참새방앗간처럼 들리던 야채가게도, 친절한 마트 사장님도, 떡볶이집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내가 살았던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아 내가 산 집으로 다시 살러 떠난다. 단출해진 살림살이와 함께....

작가의 이전글 초보 수영 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