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봄 Jun 21. 2022

해방문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 우치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 남는가>를 읽고 썼습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20대에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를 읽고, 표층적인 차원에서 무슨 말인지 뜻을 몰랐지만 ‘내 말을 들어 달라’는 저자의 뜨거운 마음만은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곳곳에 나오는 고유명사의 함의도 몰랐고, 자주 나오는 현상학이나 존재론의 용어 뜻도 알 수 없었지만, ‘여기에 자네가 긴급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 쓰여있어. 여기에 쓰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주게’라는 명령에 가까운 말이 또렷하게 들렸던 체험을 했다고 해요. 


 한마디로 어떤 의미에서 레비나스의 책을 펼친 순간에 나는 레비나스 철학의 본질과 쾅하고 머리를 부딪친 셈입니다. 언어의 의미를 몰라도, 그 책이 쓰인 역사적 문맥을 몰라도, 프랑스어를 잘 읽지 못해도 ‘전해지는 언어’는 전해진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확신하는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반면에 지금 우리 주위에 오고가는 언어의 대다수는 ‘전해지는 언어’가 아니라 단지 ‘나를 존경하라’고 명령하는 언어라고 말합니다. 내용은 다양하더라도 메타 메시지는 ‘난 머리가 좋으니까 날 존경하도록 해’라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좋은 내용도 담겨 있고 훌륭한 내용을 말하기도 하지만 메타 메시지는 오직 ‘내게 존경을 표하라’는 것뿐이라고 해요. 


 그러면서 말합니다. 메타 메시지는 머릿속에서 지어낸 작문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온다구요. 언어의 표층이 아니라 ‘언어의 혼’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 혼은 신체의 깊은 구석에 있으면서 언제나 펄떡펄떡 맥박치고 있는 생명의 파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언어야말로 진정으로 깊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뒤흔든다고 이야기 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나의 메타 메시지를 떠올렸습니다. 나 애쓰고 살았어. 좀 알아줘. 인정해 달라고. 이게 아닐까 싶어요. 쓰고 보니 참 빈약한 의식이었습니다. 이런 의식이 내 신체 구석구석에 있었다는 것과 말과 글과 표정과 몸짓에서 다 베어 나왔을 거라는 사실에 아찔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을 테지요. 이 진동을 바꾸고 싶습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이제 언어화해서 표현하는 단계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같이 얘기하면서 놀자. 헛소리도 하면서. 이러고 싶네요. 생명의 파동이 바뀌면, 진동이 바뀌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이야기가 빈약하고 지루하고 막다른 지점에 왔다고 생각되시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봐요. 주파수를 바꾸고 다른 채널이 되어 또 다른 방송을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때. 왠지 신나지 않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현재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