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에서 앤과 다이애나가 처음 만났을 때 우정을 맹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스러운 두 소녀는 숲속에서 태양과 달이 비추는 한 벗에게 충실하겠다고 서약한다. 약간은 과장되면서도 사뭇 진지하다. 맹세는 원래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해야 한다며 숲길을 그것이라 상상하자고 앤이 제안한다. 이유를 설명하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시냇물, 두 사람 사이에는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나는 사람들을 넓게 두루 사귀는 편은 아니다. 무심하기도 하고 관계에 쏟는 에너지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좁지만 깊은 관계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 여기며 살았다.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가둬두었던 말들을 풀어놓았고 그런 태도가 관계를 만들어 가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면 아무하고나 할 수 없는 속 깊은 이야기를 서로 받아들이고 나누는 것이라고 나름의 기준이 서 있었나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공유했던 친구들도 이야기만큼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시간과 함께 떠나갔다. 옛 친구의 자리가 현재의 친구들로 바뀌면서도 나의 기준은 변하지 않았다. 친구 a에게서 의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a와는 처음부터 잘 통했다. 장녀라는 공통점에서부터 영화와 여행, 정치 취향까지 비슷해서 주말과 휴가를 자주 같이 보내며 안부 이상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조금 다른 것이라면 음식을 대하는 자세라고 할까. 대충 분위기 괜찮은 곳, 과히 나쁘지 않을 정도면 만족하는 나에 비해, a는 음식 궁합과 맛에 예민했다. 소스와 향신료도 갖춰서 먹었고 속이 편한 음식도 잘 가려 먹었다. 나에게 없는 큰 장점이라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10년이 훌쩍 넘자 우리의 이야기는 새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그즈음 친구는 요리 수업을 신청했고, 나는 독서심리상담 과정을 수강했다. 멀어져있던 책과 가까워지면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되면서 한결 숨통이 트였다. 문제는 그 개운함을 a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던 데 있었다. 개인적인 고민을 책을 통해 마주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내 판단은 오산이었다.
“나 책 안 좋아해”
“안 좋아했어?”
“그리고 재밌는 얘기만 하고 싶어.”
나의 권유는 강요였을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a의 경계를 내가 침범했던 걸까. 그 일이 있고 한동안 우리는 소원했고 연말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소소한 이야기, 안전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며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a가 권해주는 음식 조합이 나도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우리 사이를 가르는 차가운 바람길, 좁힐 수 없는 그 거리를 둘 다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독일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은 <외로움의 철학>에서 ‘진중한 신뢰는 늘 위험에 대한 자각과 함께하므로 일말의 불신을 포함한다. 진중한 신뢰는 분명한 선을 두고 그때그때의 사정을 참작한다. 진중한 신뢰는 자기가 어떤 위험을 무릅쓰거나 상처받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맹목적인 신뢰가 아니라 불신을 품은 신뢰, 변화를 수용하는 신뢰가 진짜 신뢰라는 뜻이라 이해했다. 내 뜻에 벗어나는 상대의 선택을 감당할 때에야 시작되는 것이 진중한 신뢰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인간은 홀로 있고 싶으면서도 연결되어야 하는 존재다. 공존을 위해서는 우정이든 사랑이든 존중하고 믿는 마음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 마음이 저절로 오지는 않는 것 같다. 잘 알고 있다는 오해가 깨어지고, 불만이 없던 서로의 취향이 불편함으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뜸해진 기간 동안 각자의 좁아진 공간에서 되새김질을 하다가 그럼에도 연결되고 싶은 관계로 다시 한번 향할 때, 차가운 바람길은 지혜로운 시냇물로 바뀔 수 있다. 따로이 흐르다가도 강으로 바다로 결국엔 모여드는 물줄기처럼 우리는 수시로 갈라졌다가도 계속해서 더 먼 곳으로 함께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