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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Feb 03. 2023

지구에 온 이유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뭐가 바뀌었을까. 퇴직 전과 후의 나.      


 정년보다 십이 년 먼저 퇴직을 결정했을 때 나는 아쉽지가 않았다. 더 높은 직급에 대한 기대도, 그에 따른 수입도, 소속과 직함이 주는 안정감도 모두 미련 없이 놓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일에 대한 욕심이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새로운 업무를 맡을 때마다 몇 개월은 적응하는데 힘을 쏟았고 실수를 줄이려고 스스로를 미리 들들 볶았으며 부족한 점이 드러나면 잠을 설치는 부류였다. 조직은 어찌된 것인지 열심히 하려는 사람에게 일을 잘도 준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사나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내 판단에) 일하는 것보다 높게 평가받는 사람들이 보기 싫었고, 그들에게 나는 유연하지 못해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일과 인간관계. 돌아보면 나는 이 두 요소를 부드럽게 다루지 못하고 콧김을 뿜으며 돌진하는 투우처럼 온몸으로 돌파하려 했다. 참 무모했고 세상 이치를 몰랐었다. 


 이익과 손해, 옳음과 그름을 나누어 따지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의 바닥에는 어떤 강박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위에 서고 싶다, 실수 하면 안 된다’라는 강박은 나를 나아가게도 했지만 내가 설 자리를 좁게도 만들었다. 어쩌면 관계라는 섬세한 영역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보다 효율적인 업무 영역에 힘을 쏟았고, 그것이 ‘객관적’이어서 ‘옳은 것’이라고 판단을 굳혔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과 인간관계는 똑 잘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내 마음처럼 그때그때의 변수가 한꺼번에 버무려져 있는 것이란 걸 느리게 배워갔다.      


 담당자에서 중간 관리자인 사무장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발령을 받은 동에서 단체의 첫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동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소란이 일어났다. 위원장이 그동안 품고 있던 불만을 발설한 것이다. 안건에도 없던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위원장에 대한 대접이 소홀하다는 것이었다. 회의 진행을 하던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위원장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곳은 짚어 드렸고 앞으로 잘 해나가겠다는 말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도 없이 첫 회의에서 그런 소란을 맞닥뜨리고 나니 그날은 잠이 오지 않았다. 미혼이고 젊은 사무장이라 우습게 보였나 싶기도 했고 앞으로 계속 웃는 얼굴로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며칠 속을 끓이던 중, 예전에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 언니와 퇴근길에 마주쳤고 나는 어렵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또라이네.”     


 선배의 첫마디에 내 마음은 확 풀어졌다. 그리고 몇 년 전 자신도 사무장으로 있을 때 겪었던 여러 부침들을 하나씩 꺼내놓는 것이 아닌가.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는 어떤 지혜로운 충고보다 위로가 되었다. 문제를 꽁꽁 싸서 혼자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무능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마음의 짐을 나눌 수 있는 동료로 받아들여진 기분이었다.      


 고민을 나누기 힘든 태도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퇴직 이후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 같은, 내가 좋아서 시작한 활동에서도 여전히 애를 쓰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나가는 참여자들에 비해 나는 뭔가 엑기스를 말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문어체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힘을 준다고 할까, 나를 다 보여주려 한다고 할까. 아무튼 마치고 나면 여유가 없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었는데, 그때, 선배 언니한테 털어 놓았던, 함께 나눠도 되는 그 빈틈이 갑자기 떠올랐던 것이다. 아는 것을 다 말하지 않아도, 그래서 아쉬움이 남아도 괜찮은데 빈틈없이 보이려했고, 어쩌면 그것은 고민을 다 해결한 사람으로서, 조언하는 위치에 서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바뀐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휴 한숨을 쉬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녀를, 그도 아니면 사랑하는 그 무엇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왜 나는 나 하나만 오래 붙들고 있는 걸까. 괜히 남 탓을 하고 싶어 내 이전의 나를 원망하고 싶어진다. 무슨 숙제를 나에게 남겨준 건지 묻고 싶어진다. 그러다 몇 년 전 보았던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은 번개를 하나씩 품어야만 지구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품고 온 번개가 무언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만 하면 빈틈 많은 인생을 온전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구에서 산다는 건 참 복잡한 일이어서 그 신호를 오래도록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가장 우선순위로 떠오르게 되는 것 같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머릿속을, 마음속을, 살아온 태도까지 돌아보며 낑낑대는 것도 그것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신호를 내가 착각한 거라면? 품고 온 번개는 원래 찾지 않아도 되며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지구에서는 우리가 출발했던 저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고 우주를 상상하며 살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을 놓아보고 싶어졌다. 내가 품고 온 번개가 특별한 재능이든 고유한 결핍이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뛰어할 것도 없지만 실망할 것도 없는, 그저 머리카락처럼 손톱처럼 있어주어 고마운 존재로 생각하면서, 소울의 주인공처럼 떨어지는 나뭇잎에 행복감을 느끼며 현재 살아있음을 충분히 느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퇴직을 결정했을 때 나는 이제야 내 삶을 찾는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큰 미련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퇴직 그 자체로 큰 변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년을 보내면서 수시로 과거의 삶 속에서 나를 찾고 재발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반복의 끝에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어찌되었든 지금 난, 읽거나 쓰거나 하는 장소에는 기분 좋은 설렘으로 찾아가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느냐고. 이미 너의 세계에는 글과 말로 이어진 인연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서로 다른 박자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과 얽히는 속에서 수많은 번개들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지켜보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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