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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봄 Mar 30. 2023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를 읽고

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세상에는 기준이 많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별로 구분되고 부모의 경제수준에 따라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뉜다. 나이와 세대, 지역, 교육수준, 외모, 성격, 취향, 직업, 거주 지역 등등 편 가르고 차별하는 기준은 무수히 많다. 기준이 정해지면 도달하려는 경쟁이 시작된다. 주류와 아웃사이더의 세계가 견고해진다. 세상은 그렇게 생겨먹었다.      


존 케이지는 그런 세상의 흐름에 <사일런스>를 툭 내밀고 말한다. 기준은 없다고. 정해진 것, 오래된 것, 교육받은 것, 과거와 전통에 갇히지 말라고.      


연주자가 아니라 청중을, 연주음이 아니라 소음을, 작곡가의 감정을 따른 전개가 아니라 우연성으로 만들어진 곡을 음악의 범주로 쑥 포함해버리면서도 “이러면 왜 안 돼?”라고 진지해지거나 “클래식아, 다 덤벼”하며 전사가 되려는 마음은 일도 없이 버섯요리를 우적우적 먹을 것 같은 그는, 같이 있으면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가도 왠지 모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흥미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음악 강연인지 철학 강연인지 모를 책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낭독 중에 띄엄띄엄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엉뚱함이 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어떤 것을 무심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존 케이지가 되는 상상을 해본다. 지금 그는 음악 공연장에 앉아있다. 지휘자가 나오고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기 위해 사람들은 침묵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청중이 침묵하자 그의 귀에는 옆 사람이 몸을 움직이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앞줄에서 몇 번의 기침소리가, 흠흠 하며 목소리를 다듬는 소리가, 심지어 자기 귀에서 뛰는 맥박 소리가 더 또렷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교향악단의 정교한 연주음 사이로 소음의 향연이 이어진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박자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길이로, 다듬어지지 않는 색깔로.   

   

그래서 이런 구절들을 적지 않았을까?     


음악의 소재는 소리와 침묵이다. 이 모두를 통합하는 것이 작곡이다.

(74p, 현대음악의 전조)     


나는 마음과 귀의 분리가 소리를 망치며 우리에게는 백지상태가 필요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소음을 사용했다. 소음은 관념화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소음을 음정보다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음은 또한 차별을 받아왔다. (143p, 무에 관한 강연)


어떤 식으로든 거슬린다는 것은 곧 우리 사고의 경직을 막아 준다는 뜻이다.

(53p, 프로세서로서의 작곡)     


우리의 관심사는 다름의 공존이다. 융합이 일어나는 중심점은 곳곳에 퍼져있는데 청자의 귀가 있는 곳은 어디나 바로 그 중심점이다. 이 부조화는 단지 많은 사람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조화일 뿐이다.

(12p, 실험음악)     


그는 기성의 질서와 가치에 도전하는 전위 음악가였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한 깨어 있는 사람이었고, 그 생각을 직접 실천한 사람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이 책이 읽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목적은 인생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거나 창조를 통해 진보를 이루는게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사는 인생 자체를 일깨우는 것입니다. 욕망과 생각을 버리고 물 흐르듯 흘러가게 두면 우리 인생은 매우 근사해지니까요. (115p, 무용에 관한 네 편의 소고)     


그는 음악의 과거도 미래도 관심 밖이라고 답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현재였다. 

(81p, 미국 실험음악의 역사)     


예술은 찬란한 빛으로, 나머지 인생은 어둠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내 생각은 물론 다르다. 예술의 빛이 닿지 않을 만큼 어두운 인생의 단면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그 어둠 속에 머물고 싶다.

 (55p, 프로세서로서의 작곡)     


나는 클래식을 잘 모른다. 현대 음악 역시 문외한이다. 다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조성진과 임윤찬의 성취가 대단하지만, 심사위원단이 그들의 연주 실력과 클래식에 대한 해석 능력에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차이에 차이를 변별하는 세계에는 침묵 속에 언제나 발생하고 있는 소음은 소리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소리의 주체인 우리 청중들의 귀는 정상이지만 반은 듣지 못하는 귀가 되버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귀가 기준을 세우는 세계에만 속할 때 인생의 대부분은 쓸모없이 허비되는 시간이 되지는 않을까.  

    

스스로를 좁은 길에 세우지 말고 예측 불가능한 소음이 공존하는 세계로 초대한 존 케이지를 지금 만난 건 분명 행운이다. 침묵 속에 발견한 더 넓은 세계, 우리가 실존하는 현재의 시공간에서 오늘도 하루하루의 의미는 채워지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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