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의 마음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설득도 잘 된다.
이른바 과몰입형이다.
영화를 볼 때에도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류의 영화를 보고 나면
러닝타임 내내 과도한 긴장감으로 팽팽해져 있던 몸이 스르륵 풀리면서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선수의 심장 약한 친척이라도 되는 양, 나는 잘 보지 못한다.
그를 응원하지만 그가 포인트를 잃을 때마다
나는 아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차라리 채널을 돌렸다가
다시 궁금해서 돌아온다.
그가 포인트를 따면 좀 보지만
잃으면 안절부절못한다.
그래서 응원하는 선수의 경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대로 못 보는 편이다.
야닉 시너와 다닐 메드베데프의 윔블던 8강 경기가 그랬다.
게다가 더 안타까웠던 것은 경기 도중 시너가 어지러움과 구토를 호소하며
메디컬 타임까지 가졌다.
뭔가, 왠지 모르게 플레이가 평소와 다르다 했는데
몸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본인의 몸 컨디션과 상관없이 경기는 치러진다.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그를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건 아래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서 몸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기를,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지 않았을까?
나?
난 당연히 중간에 보는 것을 포기했다.
누군가 아픈 몸을 이끌고 뭔가를 하는 것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인데
그가 하물며 내가 응원하는 선수라면?
난 안쓰러워서 못 본다.
다음 날 아침 결과를 확인해 보니 그 몸을 이끌고 풀세트 접전을 벌인 끝에
결국 시너는 8강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더 짠했다. 풀세트 접전으로 올라갔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그의 멘털은 대단하구나.
어릴 때 스키를 한 덕분에 균형감각이 유달리 좋다는데
멘털은 더 좋구나.
시너는 바로 이탈리아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런던에서 요양을 좀 했을까?
8월에 열리는 US오픈에서는 다시 정상에 설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어지러움이 트라우마로 남으면 어쩌지?
코트로 등장하는 야닉의 구찌 맥시 더플백을 나는 많이 보고 싶은데?
마음의 연고가 없는 카를로스 알카라스와 다닐 메드베데프의 경기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덕분에 경기는 잘 봤다.
(메드베데프야,시너까지 꺾고 올라왔으면 알카라스도 꺾었어야 하는거 아니니?)
오늘 열리는 노박 조코비치와 카를로스 알카라스의 경기도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할 예정이다.
하지만 아주아주 불편해도 좋고
조마조마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좋으니
좋아하는 시너의 경기를 보고 싶다.
그 쫄깃함을 한 달 후 US오픈에서 맛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