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버린 경험
SNS의 ‘좋아요’에 갇혀버린 우리들만의 대화는 안전한가? 사실 내가 올린 피드에 '좋아요'가 찍히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다.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내 곁에 없더라도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는 듯한 기분이 느껴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쏟아낸 말이 나를 팔로우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고 ‘믿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소통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팔로우하고 추종하는 것들의 이야기를 신뢰하며 그것이 심지어 무조건 옳다고 믿어버리는 관계가 소통한 관계인가, 심취? 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뭔가 불분명하다.
더 나아가 인간은 누구나 아집에 빠질 수 있고 나의 논리가 어긋날 수도 있는 것인데 가치의 중심에 위치한 사람이 수많은 팔로워를 등에 업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강요한다면 어떤가… 심지어 그것마저 '좋아요'로 동조되고 있다면… SNS를 통해 내가 가치를 이끄는 사람이 되든, 내가 누군가의 가치를 따르는 사람이 되든 이 상황은 소통이 아닌 엄청난 위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이에서 단결된 대화 즉 '좋아요'를 통해 단결이 이뤄지는 합의나 대화는 가끔 주의가 필요하다. 가치의 권위를 갖는 사람이 강력하게 말언하는 순간 그것은 특별한 증빙 없이도 사실이 될 수 있고 그 안에서 아무리 '좋아요'가 오갔다고 하더라도 소통이 배제된 대화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의 신념으로 얽힌 사람들이 오랫동안 같은 생각과 현상을 공유하면 마치 사이비종교의 추종처럼 독단적인 발언이 참여자들의 경험이 되어버릴 수 있다. 즉 그들이 새롭게 마주한 상황도 특정인의 가치를 지나치게 부여하게 되어버리니… 이젠 그 관계가 더 이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위험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지유로운 경험과 판단정도를 설명하는 ‘푼크톰’은 인간이 특정한 사진을 보고 자신의 경험여부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을 말한다. 프랑스 문화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그의 저서 ‘카메라와 루시다‘에서 언급한 내용인데 특정한 사실에 대해 학습하고 나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판단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스투디움과 반대되는 용어이다.
최근에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의 동일한 커뮤니티에 갇힌 상황에서 사람들의 경험에 의한 판단들도 추종하는 자의 가치에 갇혀버리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된다.
너무 비약적인 시각일 수도 있겠지만, 점점 디지털화되는 시대에 우리의 좋아요가 담는 의미는 무엇인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 디지털이 완전정복을 이룬 시대에 ‘좋아요’가 우리의 경험까지 대체하는 시대에는 지금보다 심각한 무조건적인 추종과 그에 반하는 대립만 남겨질지도 모르겠다.
올바른 소통의 사회는 건강한 사회적 담론이 존재하는 사회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경험에 의한 다채로운 생각이 오가는 ‘푼크툼’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의 경험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양상에 따라 우린 '좋아요'와 '좋지 않아요'로 양분된 의견을 들고 서로 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건 아닌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배제한 무조건적인 '좋아요'와 '싫어요'는 정확한 이유 없이 학습되듯 자신의 확실한 의견이 되어 더 나아가는 소통을 가로막을 수 있다. 그것만이 옳다고 믿어버리는 상황.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이렇게까지 처참한 상황으로까지 빠져들진 않겠지만 최근에 교육이 양극화되고 디지털활용 수준도 양극화되는 상황을 보면 주동하는 자와 추종하는 자 그 안에서도 좋아요와 싫어요가 양립하는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극명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