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하는 과학 발전 속 정작 인간은 소외됨을 느낀다. 새로운 기술들로 육체는 점점 편안해지는데 그 이면에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쌓인다. 과학 발전으로 인한 편리성 속 우리가 느끼는 본질을 찾노라면 외로움과 고립감이 있다. 이 시대에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유행병처럼 번진다. 비단 일이 고되어서만은 아닐 테다.
이에 대해 고찰하던 중 결국 힌트는 아날로그에 있지 않은가,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날로그적 체험. 예컨대 오감을 사용하는 활동이라거나 타인과의 소통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체험과 소통으로만이 해소되는 욕구 분야'가 축적된 것이 아닌지.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 읽고 쓰는 일에 열광하는지 모르겠다. 눈으로 활자를 읽고 손으로 써 내려가는 행위에는 왠지 모를 신성함이 있다. 타인이 표현한 텍스트를 수용하거나 비판하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립하는 데에는 고도의 집중력과 두되 활동이 요구된다. 새로운 생각이 자리 잡으면 그것을 적어 보고픈 욕구가 생긴다. 타인의 텍스트로 하여금 나의 주관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고민하며 손과 펜을 이용해 텍스트를 생성해 내는 행위는 마치수양과도 비슷한 형태다. 기술과 미디어에 피로한 사람들은 이러한 일련의 수양 과정을 즐기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은 스스로를 알아가고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아주 건강한 수단이 아닌가 여기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 움직이려 애쓰는지 모르겠다. 운동과 건강에 대한 시장이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땀 흘려 일하는 행위에서 얻는 보람, 분명 우리 몸속 어딘가에선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을 테다. 신체활동이 있어야만 수확물을, 건강한 신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그 정지된 육체로는 충족되지 않는 것이 분명 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도리어 고생하고 땀 흘려 건강해지는 아날로그적 체험이 더욱 각광받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으리라 예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 자연을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캠핑의 인기가 더해지고 있다. 캠핑의 본질은 자연 체험이다.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수고로움을 들여 가며 거처를 만들고, 음식을 조리하고, 소음을 지운다. 자연에 가까워지는 과정이다. 환경을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안락에 익숙해지면서도 어딘지 모를 불안감 엄습한다.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 소멸한다는 데에서 기인한 마음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본성에는 모험심뿐 아니라 기존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인류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자연. 자연은 나면서부터 떠날 때까지 우리를 감싸는 아날로그 자체다. 자연의 소중함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인간들, 그 소중함을 더 잃지 않기 위해 동물을, 식물을, 환경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사람들은 요즘 외로운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사람이 해결하던 것들 많았는데 이젠 그 대부분을 과학 기술이 대체하고 있다. 사회성을 거세한다면 인간은 여태만큼 특별할 수 없다. 생산자(인간)와 생산물을 구분 짓는 것은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하지만 요즘은 효율성에만 치중한 나머지 '인간적 상호작용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분야'들에 조차 기계와 기술이 침범했다. 기계 이하의 효율성을 가진 인간은 생산자의 자격을 상실해 간다. 인사가 줄어든다. 대화가 줄어든다. 축하나 연민 같은 감정들, 존중과 배려 같은 가치들이 자취를 감춘다. 얼굴을 맞대고 살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갈등들 세상에 만연하다. 아날로그가 사라진 사회, 사람들은 그래서 점점 외로워지는지 모르겠다.
기술 발전이 주는 편리함을 누리는 것 분명 이점이 있다. 이젠 과학에 의존하지 않고는 하루도 원활히 살아나갈 수 없다. 다만 그와 더불어 아날로그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을 '스트레스에 대한 처방약'이라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편해지는 육체의 이면에서는 병들어가는 마음 있을지 모를 일이다. 움직이고, 쓰고, 생각하고, 대화하자. 우리의 몸만큼이나 마음도 건강해야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