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미국으로 도망가버렸으니
찰랑머리는 걷고 또 걸었다. 벌써 저수지 둘레를 몇 바퀴 돌았는지도 모른다. 아침부터 점심도 안 먹고 걷고 있을 뿐이다. 비가 와도 좋고, 눈이 내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머릿속을 비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흰머리가 쪼개졌던 가정을 다시 봉합하려고 하고 있고, 꽁지머리는 먼저 떠난 아내를 마음에서 풀어 주었다. 술집여자는 아들이 돌아와서 여생을 평안하게 보내겠다고 했다. 무슨 주말 드라마의 끝장면 같은 삶의 언저리로 다가가고 있다. 늙어서 제일의 소원은 평안이다. 찰랑머리는 바로 그 평안의 조건을 다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아들 녀석만 뻬고는 말이다.
그 좋다고 모두들 부러워하는 S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찰랑머리는 아들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사실 K대 한의과 대학에도 합격했었는데, 아들은 한의사를 버리고 S대로 갔다. 미국 유학을 목표로 두었던 것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기도 전에 그 유명한 기업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찰랑머리는 아들이 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선택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노랑머리 며느리를 보지 않게 해 주어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아들은 찰랑머리가 아니었다. 자기 고집이 강한 아들이었다. 틈만 나면 해외로 나갔다. 회사의 출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차를 이용하여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세월의 켜가 두꺼워졌다.
찰랑머리는 아내와 나름의 작전을 폈다. 아내는 결혼을 종용하고, 찰랑머리는 아들 편을 드는 듯하면서 며느리감을 아들 앞에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 앞에서 무참히 무너졌다. 아들은 그 좋은 며느리 후보들을 무참히 무찔러버렸다. 냉정하게 잘라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진상을 떨어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하기도 했다.
“형우야, 사람은 주관이 분명하기도 해야 하지만, 보편성을 바탕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가정을 이루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가 취해온 가장 보편적인 일이잖아.”
35세가 되었을 때 노골적으로 아들에게 결혼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아들이 독립하겠다고 집을 나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참혹한 패배였다. 아내의 수첩에 담긴 수많은 며느리감 후보들은 세상의 빛도 못 보고 그 답답한 수첩 안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아내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형우야, 엄마 좀 살려줘.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드러내고, 아니면 이 수첩을 한 번만 들여다 봐. 제발 엄마 좀 살려줘.”
아내는 아들의 오피스텔로 찾아가 밥을 해 먹이며 달래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엄마, 나는 비혼주의를 선언했어.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축의금까지 다 받았다니까.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며 살 거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이런 나쁜 놈. 그래 너 엄마 죽는 꼴 보려면 그렇게 해라.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는 거야. 아이고 나 죽네.”
아내는 작전대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눈물바다를 쏟아내었다. 아무리 고집이 센 아들이라도 제 어머의 눈물바람은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우야. 당장에 결혼하라는 것은 아니야. 비혼이라도 철회하고 우리 서로 노력해 보자는 거야.”
찰랑머리는 어떻게든 아들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폭발할 듯 끓어오르는 마음을 감추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당장은 대답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바뀌기를 바랐던 것이다.
"야, 찰랑머리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자식 겉을 낳았지 어디 속을 낳았냐. 그냥 받아들여."
흰머리는 괜히 말했나 싶긴 했다. 찰랑머리가 '너는 다 보냈잖아'라고 덤비면 할 말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난 니 마음 충분히 이해해. 우리 아들놈도 결혼하겠다고는 하지만 전혀 노력을 하고 있지 않는 눈치거든."
꽁지머리는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아들 녀석에게 눈을 흘기며 찰랑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거 다 우리 사회가 만든 거야. TV만 틀면 결혼하지 말라고 부추기는 것들 뿐이잖아. 이혼하라고 큰소리치고, 아기 낳지 말라고 떠드는 게 방송이잖아. 정말 큰일이다."
술집여자도 혀를 찼다.
"나는 그래서 속이 상한다. 찰랑머리야, 네 아들놈하고 내 아들놈하고 데려다 흠씬 때려줄까? 나쁜 놈들. 어찌 그렇게 제 부모들 속을 태우는 거야. 바람이 되어 날아다니고 있는 내 아내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고. 참 걱정이다."
꽁지머리는 찰랑머리를 결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들놈이 도망가 버렸다. 미국으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찰랑머리는 절규를 하듯 몸을 비틀었다.
"도망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흰머리가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으며 궁금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내가 좀 심하게 말했지. 비혼만은 거두어 달라고. 지금은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곁에서 같이 숨 쉬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라고. 왜 그렇게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느냐고."
찰랑머리는 가르랑가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지 않는 울음이 가득 섞인.
"미국 지사로 자원해서 가버렸다. 마누라는 그날부터 드러누워버렸다. 절망이다. 술김에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낙이 없다."
찰랑머리는 흰머리가 물고 있던 담배를 빼앗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끼어들어 간섭할 것은 아니지만, 자식 놈들이 너무 하는 건 맞아. 우리가 지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세 살땐가 우리 딸 입원했을 때 교회도 안 다니면서도 기도했다. 차라리 내가 병실에 누워있겠다고, 저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 있냐고. 제발 살려달라고."
"늙은이가 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3대 거짓말이라고 하지? 아냐. 나는 진짜로 빨리 눈 감고 싶어."
"자식 농사라는 게 쑥갓을 심었는데 당근이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가 힘이 없고 보니 그게 참, 서럽더라고."
모두들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자식들을 미워하고,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막판에 터진 복에 겨워 입을 다물지 못하기도 하고, 치매가 시작된 아내를 걱정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울고 있었다. 좋아서 울고, 서글퍼서 울고.
밤은 이슥해졌고, 눈발은 날리는데 늙은이들은 일어날 줄을 모르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