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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꿈꾼다

1. 벽 앞에서의 좌절

by 준구

율은 연신 머리를 벽에 박아 댔다. 공기를 가르고 번지는 둔탁한 소리는 건넌방에 있는 아빠의 가슴을 후비는 메아리로 전해졌다. 처음엔 집 바깥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파장은 주먹으로 물체를 가격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율은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 막연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었다. 손이 부러지거나 벽에 금이 가지 않는 한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쿵 쿵 쿵 벽을 타고 울리는 더욱 육중해진 공명에 아빠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건 필시 머리를 콘크리트에 부딪는 소리였다.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들의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온몸으로 절망하는 율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함과 동시에 언어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율을 머나먼 곳 아프리카 르완다로 데려온 것이 불과 한 달도 안 된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율은 한국에서 지방의 외곽에 자리한 대안학교에서 학생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제도교육을 벗어나 입시경쟁으로 내몰린 삶이 아닌 자유로운 배움과 삶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택한 길이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농사도 배우고 철학도 공부하면서 조금은 다르고 폭넓은 사고와 삶을 갖기 원했다. 대학 진학에 대한 압박이 없고 인문 사회과학에 관한 공부를 일찌감치 시작해서 다양한 학문을 미리 맛보는 학창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을 시시하게 여기며 꼭 대학교육이 필요한가 반문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분위기에서 동급생 십여 명과 함께 생활하던 중에 코로나 시기를 맞았다. 일반학교에서는 발 빠르게 인터넷을 통한 수업이 이루어지고 마스크를 낀 채로 대면수업이 이루어졌지만 그곳의 상황은 달랐다. 수업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람과의 접촉이 제한되었다. 주말이면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고, 코로나가 지속되면서 학교를 떠나는 교사와 학생이 늘었다. 남은 자에겐 고립감이 커갔다. 기숙사를 함께 사용했던 급우와 선생님의 빈자리로 쓸쓸했다. 율은 그렇게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부모와 주위의 사랑이 갈급해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이제 막 시작된 고3의 불안함에서 마음의 정리와 안정이 필요했다. 변화가 필요했지만 상황에 끌려가는 시간이었다.


노환으로 힘겨워하시던 율의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그즈음의 6월이었다. 팔순을 넘기고 생을 마감한 한 사람의 죽음은 자손에게 영향을 미쳤다. 1년간 해외파견 봉사단으로 나간 율의 아버지인 사위를 국내로 불러들였고, 외지에서 고립된 손자를 집으로 호출했다. 율의 아빠는 아내와 자녀를 한국에 두고 르완다에 1년간 봉사자로 파견 나갔다. 스스로 자원해서 르완다의 고등학교 미디어교사로 나갔던 것이다. 가족모두를 데리고 외국에 나갈 상황은 안되니 그간 다짐해 왔던 소명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나선 것이다. 자신의 직업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더 어렵고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바람을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영상을 제작하는 피디로 일하면서 지구촌의 열악한 나라에서 인간애를 실현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품었던 다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단 1년 일지언정, 오십 대 중반의 나이에 더는 미루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돌보고 경제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짐을 잠시 아내에게 위임한 체,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호기롭게 낯선 타국에 나갔지만, 늘 가족이 그리웠다. 일을 마치고 저녁에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는 가족과의 식사가 떠올랐고 잠들기 전, 이런저런 이야기로 속내를 풀어내던 아내와의 대화에 목말랐다. 가져간 반찬들이 다 떨어져서 간장 한 방울 고추장 한 숟가락이 아쉬울 때가 있었고, 홀로 외롭게 식사를 해결해야 할 때는 집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게 간절해서 밤이면 집에 한번 가보는 꿈을 꾸며 눈물로 침상을 적시곤 하던 아프리카에서의 6개월을 맞이할 즈음, 장인의 부음이 전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임종이 가까웠으니 마지막을 지키라는 연락이 왔고, 몇 가지 안 되는 정당 한 사유가 받아들여져 중도에 한국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떠났던 고국이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평안한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장인의 죽음 앞에서 사위는 마음 깊이 애도했지만 아내와 자녀를 만난 기쁨의 감격을 숨길 수는 없었다. 상을 치르기 위해 학교에서 나온 아들을 대할 땐 반가움과 만감이 교차했다. 율은 말랐고 머리는 자르지 않고 길게 둬서 허리까지 내려왔다. 뒤에서 보면 여자로 착각할 정도였다. 율은 몇 개월간 학교 밖 출입을 못하고 생활도 일정치 않아 체중이 마르고 쇠약해 보였다. 한참 혈기왕성하게 공부하고 운동도 하면서 친구와 어울릴 나이인데 생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학 진학을 위해 애쓰는 고3학생도 아니었다. 아프리카의 고등학생은 가난해서 먹는 게 부실해도 생동감 넘치는데, 한국에 있는 아들은 먹을 것이 풍족해도 넘기질 못하고 바싹 말라 있었다. 아빠는 장례 기간에 율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장에서 생활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대안학교를 나와 한국을 떠나서 르완다에서 아빠와 살아보자고 운을 떼었다. 아빠는 외로워서 함께 살 사람이 필요했고, 아프리카의 또래 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율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더라도 외로울 테고 굳이 대학에 갈 마음도 없었다. 미지의 대륙에서 지내면서 그들의 문화와 삶을 느끼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빠와 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아프리카에서의 동거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장례를 마친 6월 중순, 율은 아빠와 함께 르완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엄마와 여동생과도 아쉽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작별하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했다. 에티오피아를 거쳐 키갈리에 닿았을 때 여름의 아프리카 날씨가 습하지 않고 쾌적해서 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키갈리의 풍경은 그가 살았던 강원도 산골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수많은 언덕이 이어졌고 녹지로 푸르렀으며 높은 건물로 막히지 않아 시야가 확 트였다. 아빠가 렌트로 사는 3층 높이의 연립주택은 깔끔한 아파트 형태이고 주변 건물보다 높아서 전망이 좋았다. 방 두 개에 거실이 있고 화장실도 방마다 있어서 불편함이 없었다.

방에서는 멀리 지평선까지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져 마치 전망대에 오른 느낌이었다. 아홉 가구가 사는 연립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파견 나온 한국인 세 가정 도합 5명이 살고 주위에도 한국인이 계셔서 그런대로 지낼만했다. 그중 누나 둘은 대학 재학 중에 한국어 교사와 사서로 나온 청년이어서 비교적 잘 통했다. 아침에 학교에 나갔다 오후면 돌아오는 아빠를 기다리며 식사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변 지형이 익숙해지면서 가까운 가계와 음식점을 다니기 시작했고 혼자서도 산책을 다녔다.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체 모를 외국인을 향한 현지인들의 시선이 뜨겁기는 했지만 악의에 찬 눈길이 아니기에 부담스럽진 않았다. 어쩌면 그 긴 머리가 꼬부라지지도 않은 직모라는 사실에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접근하는 사람들의 손길 앞에선 주춤했다. 설마 남자는 아닐 거야 생각하며 끝끝내 눈길을 떨구지 못하는 시선엔 웃음이 지어졌다. 르완다에선 남자가 장발로 머리칼을 기르는 경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아빠와 누나들이 출근하는 학교는 집과 가까워 율도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늘었다. 도서관으로 쓰이지만 다용도 공간으로 공연과 예배처로 사용하는 곳엔 책들이 있었다. 탁자도 놓아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 수업 후엔 학생들이 남아 있었다. 율도 자기 또래인 아이들과 섞이려 이곳에들리곤 했다. 피부 톤만으로도 튀는 외국인 무중구인 율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남녀 학생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다가와 말을 붙이고 싶어 했다. 자신의 언어인 키냐르완다어가 있지만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학생들은 영어로 율이 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봤다.

몇 살이냐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학업은 어떻게 할 계획이냐? 어떻게 이렇게 큰 결단을 하고 르완다에 왔느냐? 한국은 어떤 곳이냐? K 팝과 드라마는 뭘 좋아하느냐 끝이 없이 질문했다. 율이 학교에 나타나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와서 만나고 싶어 했다. 율은 또래 아이들이 한 교실에 앉아 수업받는 모습이 묘하게 부러웠다. 대안학교에서는 같은 반이라고 해도 대여섯이 고작인데 이곳은 한국의 고등학교 시설에 비하면 열악하지만 같은 느낌이 드는 학교였다. 학생들의 집은 누추하기 그지없는 가난이 가득하지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에는 당당함이 풍겼다. 점심으로 나오는 급식을 받아 들고 까르르 웃으며 얘기 나누는 광경에서 자신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는지 모른다. 당시 르완다는 한국보다 앞서 노마스크를 선언하며 불편함을 벗어던졌다. 코로나보다 말라리아가 더 무서우면 무서운 감염이었고, 집단 방역으로 주사도 솔선해서 접종했던 터였다. 전반적으로 가난하기에 교육에 희망을 걸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음을 알았고, 학생들도 어렵게 잡은 배움의 기회를 대학으로 연장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가정과 사회를 일으켜 보겠다는 아프리카 청소년들의 헝그리 정신을 체감하고 있었다. 율의 아빠가 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그 간절한 아프리칸의 절박함을 비로소 이곳에 와서 보게 된 것이다.


율의 애매한 상황을 인지한 현지학교 교장은 그가 마음이 있다면 입학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아빠도 같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이니 크게 반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그렇지만 학교의 환경과 시스템을 보면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국제학교가 단연 신뢰할만한 곳이었다. 율은 가능하다면 그런 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외국인들 무리에 끼고 싶었다. 문제는 그런 학교들의 높은 학비와 고3에 해당하는 학생을 받아줄 여력이 있느냐였다. 키갈리에서 1.2위를 다투는 국제학교 고등과정에 문의하려고 찾아갔다. 시설과 규모 시스템에서 국제학교는 현지학교들과 큰 차이가 느껴졌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미권에서 학교를 다니다 이곳 고등학교로 전학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영어와 다른 커리큘럼을 따라갈 수 없으니 받아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어려울 것이라고 각오는 했지만 냉정한 규정 앞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타국에 와서 그나마 학업에 대한 열정이 솟아나는 마당에 낙심했다. 율의 사정은 키갈리에서 모이는 한인교회 사람들의 입을 타고 번졌다. 목사님의 자녀는 현지의 고등학교이면서 영국의 학제인 IB체계로 가르치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비가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 외국인에게 호의적인 곳이라 다시 입학을 문의해서 응시해 보라는 것이었다. 아빠는 율과 함께 그 학교를 찾아갔고 여자 교장선생님의 환대 속에서 대화하며 추가 신입생 전형 시험 안내를 받았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치른 시험은 이틀간 이어졌다. 영문학, 경제 사회, 세계사, 지리 등의 과목을 보는데 과목당한 시간 이상을 시험지에 논하는 문제였다. 객관식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논하는 서술을 영어로 써 내려가야 하니 율로서는 생소하기만 했다. 우리말로 기술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영어로 논해야 하고 배운 내용도 아니니 태반 모르는 문제 투성이었다.


본인은 성의를 다해서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앉아 써 내려가는 시늉을 했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은 허락되었지만 율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 학년을 내려서라도 받아주기만 한다면 다니고 싶다는 읍소에도 학교의 결정엔 변함이 없었다. 대체로 정에 이끌리는 아프리카의 정서와는 다르게 유럽의 학교 시스템을 정확히 준수하고 있었다. 그런 거절과 좌절 막막한 현실 앞에서 율은 자신을 자책하듯 벽 앞에서 절망하는 중이었다. 냉혹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태어나보니 선진국에서 아쉬움 없이 지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자각하는 중이었다. 배움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대학은 직업을 얻기 위한 과정처럼 느껴져서 본질적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대학의 본질은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고 확장된 세계와 만나는 장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 길이 묘연해짐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 막 싹트는 열망을 살려보지도 못한 체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머리만 하염없이 찍어 대고 있을 때, 정신을 번뜩이게 만드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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