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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톡이 전하는 잔잔한 위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통화

by 준구

페이스톡임을 알리는 고유한 벨소리가 울렸다. 순간, 율은 움직임을 멈추고 전화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였다. 걸려올 곳도 없는 핸드폰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는데 막상 영상통화를 하려니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었다. 울먹이던 목소리를 진정할 시간도 필요해서 급히 옆방의 아빠를 불러 대신 전화를 받아 달라 부탁했다. 마음을 추스르면서 누가 어떤 용무로 전화를 했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전화는 르완다로 봉사 온 찬심누나로부터 걸려왔다. 봉사자들은 대게 대학 재학 중이거나 대학을 졸업한 나이로 주말이면 시간을 내어 키갈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청년들은 생일자를 챙기며 축하하는데 이런 모임이 타국생활 중 서로에게 주는 기쁨이자 위로였다. 이 자리에서 율이 생각이 나서 같이 하자고 불러낼 요량에 전화를 걸은 것이다. 율의 아빠는 아들 대신 청년과 화상통화를 나누면서 그들의 마음 씀에 고마워했다. 가뜩이나 또래가 없는 데다 어디 마음 놓고 다닐 곳도 없는 아이를 감싸주려는 배려가 따뜻했다. 학교에서 거부당했다는 소식을 청년들은 이미 들어서, 좌절하며 절망에 빠진 율을 긍휼히 여긴 게 분명했다. 율이 급히 눈물을 닦고 나서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모여 있던 형과 누나들은 어서 나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자며 얼르고 있었다. 율은 마지못해 억지로 끌려나가는 듯했지만 형누나들의 위로에 마음이 풀어져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었다.

처음에는 안 나가겠다고 버팅겼는데, 누나들은 어린 동생에게 갖은 사탕발림과 애교를 보이며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기 동생을 달래듯 마음을 써주는 모습에 굳었던 표정이 밝아지며 웃음까지 지었다.

예전에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난데요”라고 말하면서 놀려대곤 했었는데, 이 표현에 딱 맞게 감정이 순식간에 바뀐 셈이다. 하마터면 벽에 금이 가던지 자신의 손목이 날아가던지 양단간의 절단이 날 것 같은 폭풍의 회오리가 지나가자 다시 집안은 고요한 평온이 찾아왔다.

율의 아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율은 절망의 나락에서 따스한 온정의 위로를 경험했다.


르완다에 온 청년 십여 명은 각각 봉사하는 기관과 맡은 역할이 달랐다. IT교육을 맡은 이가 있었고 기관의 제정을 담당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유치원과 학교의 교사와 음악 체육 한글 선생님 등 그 임무가 다양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싱글 청년들이 고국을 떠나 먼 타국에 기거한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이타적인 마음이 있고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성품을 갖고 있기에 모든 것이 낯설고도 미지한 이곳 아프리카도 마다하지 않고 온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음식이 맞지 않고 교통과 문명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곳에서 서로를 보듬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몸으로 깨우치고 있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록 종교를 갖지 않더라도 예배당으로 모이는 것은 코리안 커뮤니티가 교회나 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년들은 자기들끼리도 잘 만났지만 주일이면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런 만남을 통해서 현지에서 사는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었고 한국의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먹었다. 누구의 집에 모이든 거주하는 곳은 치안과 시설이 잘 갖춰진 곳이라 음식을 조리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혼자서 살아갈 때는 그냥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이렇게 사람이 함께 모이게 되면 신경 써서 음식을 만들어 냈다. 한국에서 가져온 비장의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김밥을 말고 고기도 구워 뚝딱뚝딱 잔칫상을 차려냈다. 청년들의 에너지와 열정은 창조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속 마음을 꺼내어 서로를 달래고 위로하며 힘을 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미정은 한국에서 큰 좌절을 겪던 중에 르완다를 선택한 경우였다. 대학 4년을 졸업했지만 취업의 벽이 높았다. 한두 번 최종 면접을 보고 될 듯 말 듯 희망고문 속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취업전선에 매달려 2~3년을 몰입하다 보니 자신감도 에너지도 다 소진된 자아와 마주하게 됐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자기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봉사단에 지원했는데 용케 선택된 것이다. 이제 불과 몇 개월을 르완다에서 보내고 있지만 가슴이 뻥 뚫리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졌다는 고백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대면서 살 필요가 없는데, 자신을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 집어넣고 스스로를 닦달하고 몰아붙이며 학대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론 천천히, 없으면 없는 데로, 뭐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여유를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한국사회를 벗어나보니 우리 사회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는 얘기다.

가난한 땅 모든 것이 넉넉지 않은 공간에 와서 그들을 돕는 자의 역할 속에서 깊은 성찰에 이른 것이다.

미정이가 말하는 톤과 결로 다른 청년들도 한결같이 자신이 느끼고 깨우친 것들을 나누었다.

찬심과 미정이 율에게 전화를 걸어서 밖으로 불러 낸 것은 어쩌면 울고 있던 과거의 자신에게 구원의 밧줄을 건넨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좌절에 빠져 있을 필요 없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의 미래는 창창하게 밝을 거야’

‘좀 늦으면 어때 방향만 옳다면 우린 힘을 낼 수 있어’


그날 율은 누나와 형들이 만들어 준 한국 음식과 생일 케이크를 먹으며 잠시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좌절했지만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따스하게 전달받은 것이다.


그때는 좌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가 미처 꿈꿔보지 못했던 대학으로 이끌고 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




표지 : AI가 만들어 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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