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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국 Mar 05. 2021

난도질당한 결재 문서

거짓된 내용은 덤

https://brunch.co.kr/@england/120



그렇게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났다. 출근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팀장은 어제 회의에 대한 결과물을 요구한다. 간부 직원이 퇴근 후 내게 업무 메시지를 보낼 정도니 다들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 치근덕거림을 뒤로하고 자리에 앉아 밥벌이를 시작한다.


초안 작성까지는 1시간이 소요됐다. 그토록 싫어하는 비문은 없는지, 맞춤법이 어긋난 곳은 없는지, 사용한 단어는 정확한지, 쉽게 읽히는 문장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초안 작성했습니다. 검토 바랍니다."


기세 등등하게 팀장에게 말하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자리를 박차며 일어난 내 모습은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팀장을 거쳐 간부 직원에게 보고된 문서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초안 작성을 끝낸 시점에서 사실상 내 역할은 끝났기 때문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보채던 사람들의 피드백이 없으니 조금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퇴고를 마친 문서는 늦은 오후 시간에 전달받았다.


지금의 회사에서 정말 별별 꼴을 보고 겪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울 게 없다. 내가 작성한 문서가 전달하려는 내용만 간신히 유지된 채 난도질당한 것을 봐도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그래서 왜,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난도질을 당했는지 전달받은 문서를 살펴봤다.


어려운 단어가 덕지덕지 붙은 긴 호흡의 문장에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3~4줄이 넘어가는 문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솔직히 혐오스럽기도 하다. 심사숙고해서 작성한 문서를 난도질한 결과물이 이따위 것이라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논의된 사실이 없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거짓된 내용이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결정할 문서에 기재되었다. 나는 이렇게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그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 회사에서 작성하는 문서의 미덕이 아무리 상사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거짓된 내용'이 들어갈 이유는 없다.






전달받은 문서를 수정할 권한은 내게 없다. 그대로 상신했다. 그러고 나서 이런 일이 언제부터 계속되었는지 생각해봤다.


좋은 글에는 여러 가지 이유도, 여러 가지 조건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유가 존재하고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좋은 글이라도 한 가지 전제는 지켜져야 한다. 


'좋은 글은 사실 혹은 진실만을 담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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