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함을 기꺼이 마주할 용기
"나, 상처받았어." 혹은 "나 속상해."
넘어지고 고꾸라져서 무릎에 상처가 난 적은 있어도 상처받았다는 말은 내가 자주 쓰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약한 영혼임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더욱이 경계했던 뉘앙스의 말이기도 했다. 실제 상처를 받았어도 '그럴 수 있지'로 넘어갔던 것도 같고, 그걸로 기분 나빠진 나를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마스다 미리의 '오늘도 상처받았나요?'에서 나는 '상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엄청나게 쓰리고 아파야만 상처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작은 것도 상처다. 인간관계에서 서운한 감정을 느꼈거나, 스스로의 무력감에 직면할 때도 상처가 된다. 그러면 가슴이 쓰고 빼쭉해지는 것이다.
누구나 셀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다만, 그게 상처라고 인정해주느냐 그냥 흘려보내느냐의 차이지 않을까 싶다. '상처 받았구나'라며 인정해주기만 해도 새살이 조금 돋아날 수 있다.
상처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내 마음에 일어나는 굉장히 껄끄러운 것들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별스럽지 않은 일이 되고 불편한 감정 역시 별 일 아닌 것이 된다. 그럼 이 불쾌한 찌꺼기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건 무색무취로 소멸되는 건 아닐 것이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져 이상한 기색으로 부풀어 오르게 된다. 그러다가는 펑!
물론 상처 받았다고 징징대자는 건 아니다. "나 상처 받았어, 속상해!"라고 말한 뒤에 그럼에도 어떤 상처든 다 맞서 싸우겠다고 기합을 넣자는 게 요즘 내 모토랄까. 상처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직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은 합리화와 회피로 간편하게 묻어둘 것을 헤집어 꺼내는 행위다. 그러면 더 큰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 믿는다.
자그마한 내가 커지기 위해서 몹시 여러 차례 뒹굴어야 한다.
상처는 아프다. 나의 상처는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들여다 보아야만 새살이 돋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