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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Oct 15. 2023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그녀들

- <도망친 여자>


지난 2018년 개봉한 <강변 호텔>에서 외딴 호텔에 머물던 늙은 시인은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홍상수의 페르소나인 듯한 노시인, 평그의 영화 속 남자들처럼 평생을 여자 주변을 맴돌며 찌질하게 사랑을 향해 추파를 던지던 그는 결국 그렇게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는 자신의 본능적 세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남성들의 세계에 마침표를 찍은 듯했다. 줄기차게 '그' 들의 이야기에 천착해 왔던 홍상수 감독이기에 '죽음'으로 종착역에 도달한 듯한 그의 세계에서 과연 더는 할 이야기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건 1막의 끝일 뿐이었다. 배우 김민희와 함께 한 이후 <밤의 해변에서 혼자>, <클레어의 카메라>, <풀잎들>을 통해 그간 홍상수 감독이 천착해 왔던 남자들의 세계에서 '객체'였던 여성들이 조금씩 홍상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도망친 여자>는 그 프레임의 시선이, 주체가 변화되었음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영화의 2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민희, 5년 만에 외출하다 
영화는 번역가인 남편과 함께 산 지 5년 만에 홀로 첫 외출을 감행한 김민희의 여정을 따른다. 

처음 그녀가 찾은 곳은 '언니', 서영화의 집이다. 서울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사는 영화는 텃밭까지 갖춘 전원의 빌라 단지이다. 서로 반가운 덕담을 나눈 두 사람은 민희가 사온 막걸리를 나누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눈다. 

<도망친 여자>에서 보여진 홍상수 감독의 새로운 특징은 '대화'이다. 물론 이전의 영화에서도 홍감독에게 있어 '대화'는 주요한 영화적 장치였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엇물리는 듯한 대화를 통해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가가는 계기로 작용하곤 했다. 그처럼 홍상수 감독에게 있어 '말'은 그저 '말'이 아니라 '관계'의 리트머스 시험지같은 것이었다. 드러난 '언어' 이면의 미묘한 '관계'를 알 수 있는. 

 



 

하지만 이제 <사라진 여자>에서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영상 미학으로서 영화의 또 다른 '도전'이 된다. 민희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의 삶이 드러난다. 한때 연극을 하던 남자와 결혼 생활을 했던 영화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도심에서 멀찍히 이곳에 터전을 잡은 영화는 또 다른 여성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엄마가 도망친 젊은 여성에게 '따뜻한 품'을 내준다. 영상으로 보여지는 대신, 관객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영화의 삶을 추측한다. 마치 읽어주는 책처럼, 영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등장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민희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홀로 사는 선미의 집이다. 역시나 인사치레를 넘긴 두 사람의 대화는 선미의 삶으로 향한다. 오랫동안 필라테스 강사를 통해 돈을 제법 모은 선미는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살고 싶은 곳에서 만나고 싶은 만나며 살고 싶다는 선미, 그래서 편의성은 떨어지지만 바라보이는 경치가 좋고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모이는 이곳에 터전을 잡았단다. 

여정의 끝은 한 복합 문화 공간, 홀로 차를 만시던 민희 앞에 뜻밖에 예전에 알던 새벽이 등장한다. 어딘가 껄끄러워하는 민희와 달리, 민희와의 해후를 반기는 새벽, 그러면서 오래 전 새벽의 남편으로 인해 어긋났던 관계에 대해 뒤늦은 사과를 전한다. 그리고 그 사과를 받아들인 민희에게 사과를 깍아주며 한때는 민희를 아프게 하며 '쟁취'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결혼 생활을 토로한다. 

 



 

우리 시대 여성의 삶과 결혼 
영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연배는 다르지만 여성들의 모습을 주마등처럼 비춰준다. 그리고 거기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물음이 내포되어 있다. 중년의 영화는 아마도 그 또래 여성이라면 기대되어질 남편과 아이와의 삶 대신, 동반자적인 또 다른 여성과의 평안한 삶에 만족한다. 아이를 키우지는 않지만, 이웃의 여성에게 '모성'적인 위로를 건넨다. 홀로 사는 선미 역시 경제적인 면에서나, 관계적인 면에서 충분히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려 한다. 영화나 선미의 모습은 이제 더는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결혼'은 필요 충분 조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반면 민희를 아프게 하면서 까지 결혼을 했던 새벽의 경우에는 남편은  이제 tv에도 자주 출연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그렇게 유명해진 남편이 외려 마땅찮다. 유명세에 걸맞게 이곳 저곳에서 동어 반복적인 말을 되풀이하는 남편의 속물적인 모습에 실망하는 중이다. 말은 많지만 관계는 충실치 않는 결혼 생활이 어쩐지 불편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민희는 어떨까? 영화는 어쩌면 이들 여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의 제목인 '사라진 여자'라는 퍼즐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민희는 그녀의 말처럼 5년만에 외출을 한 것일까? 그 힌트는 세 사람을 만나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결혼에 대한 뉘앙스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난 5년 동안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민희,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면 그렇게 항상 함께 해야 한다고 말한 주체는 민희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며 남편의 입을 빌어 전하던 민희는, 선미를 만나고, 그리고 결혼 생활의 권태를 토로하는 새벽과의 만남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늘 항상 함께 하는 남편과의 삶이 '사랑'만은 아닐 수 있음을 살포시 드러낸다. 

그리고 그렇게 여성들의 삶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과 달리,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프레임의 주변에서 서성이다 사라진다. 영화의 집을 찾아와 영화네가 밥을 주는 길고양이를 대번에 도둑 고양이라 지칭하며, 자신의 아내가 고양이를 무서워한다며 따지고 드는 안하무인의 이웃 남자, 선미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을 떠맡기려는 시인, 그리고 우연히 민희와 만나, 민희가 마치 자신을 찾아온 듯 오해를 하며 감정의 부스러기를 흘리는 새벽의 남편 등은 이전의 홍상수 영화 속 그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는 예의 그 남자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영화 속 여성들에게 '어이없음'만을 선사한다. 마치 이런 남자들과 저 여성들이 어떻게 한 하늘을 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냐며 반문을 하듯이. 독불장군같은 영화의 남편이나,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엇이든 함께 해야 한다는 민희의 남편도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맥락에서 전해진다. 

여전히 '결혼'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의 대표적인 '행복' 장치로 인정받는 세상, 하지만 영화는 그 장치의 안과 바깥에서 살아가는 등장 인물들을 통해 그 '제도'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그 '제도'를 통해 행복을 담보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연배의 여성들의 삶을 통해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도 각자 다양한 삶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영화를 통한 홍상수 감독의 목소리가 현재 자신이 선택한 관계에 대한 해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감독의 의도를 넘어 동시대 여성들의 진솔한 삶에 다가선다. 아마도 베를린 영화제가 그에게 감독상을 수상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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