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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Oct 21. 2023

긴 하루

아침 7시 집을 나섰다. 노트북에, 책에, 여행에 필요한 이러저러한 물품들까지 백팩이 가득찼다. 아이들은 할머니같다 질색했지만, 네 바퀴 달린 백팩이 나에겐 안성맞춤이다. 지난 번 맞춤하게 떠났더니 초행길에 허둥지둥, 오늘은 넉넉하게 집을 나섰다. 그랬더니 한 시간 여의 여유, 비로소 서울역 구내를 둘러보게 된다. 그렇다 나는 오늘 경북 영천으로 간다. 



군부대 독서 코칭 수업으로 가게 된 영천 행, 벌써 두번 째 길이다. 바쁜 부대 일정에 맞춰 조정, 재조정을 하고 겨우 떠나게 된 첫 번 째 수업, 동대구에서 이름조차 낯선 누리로로 갈아타야 하니 긴장, 또 긴장의 연속이다. 동대구에서 내려, 누리로로 갈아타는 시간이 20여 분, 두번 째 가니 갈아타기에 넉넉한 시간인 줄 알게됐지만, 처음에는 바퀴달린 가방을 끌고 동대구 역에서 100 m 달리기 하듯 뛰었다.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철도 파업.......  영천에서 돌아오는 열차가 사라졌다. 수업이 끝나고 '미션 임파서블'하게 역으로 달려와야 하는 표를 다시 구하고 나니, 동대구에서 떠나는 건 거의 두 시간 여의 텀이 생겨버렸다. 


'오리 지랄'이라던가, 물 위의 오리는 둥둥 떠있는 거같지만, 물 아래에서는 분주하게 다리를 젓는다는데,  입으로는 연신, 차분하게, 느긋하게를 외워대면서도, 눈동자는 이리저리, 머릿속은 거의 LTE급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늦지 않으려고 넉넉하게 예매한 덕분에 영천에서 점심 먹을 시간도 생겼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일상을 여행처럼'이라며 영천 맛집을 검색해 본다. 당일치기 여행에서 유명하다는 영천 휴양림을 볼 여유는 없지만, 영천 맛집에서 점심은 먹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다. 내가 언제 또 누리로를 갈아타고 영천에 와보겠는가. 그래봐야 영천 역에서 십 분 여 거리 정도만 내가 갈 수 있는 맥시멈이라, 가방을 끌고 시장통에 가서 유명하다는 소머리 국밥을 시켰다. 이 동네 '소'가 유명하다더니, 고기는 참 푸짐하다. 


드디어 수업, 스물 서너 명의 또롱또롱한 눈망울을 만나는 시간, 그래도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본 엄마여서 그런가 군복입은 젊은이들이 낯설지 않다. 강원도 고성이 세상에 제일 춥다는 큰 아들과, 서울 세종대왕 동상 앞이 제일 춥다는 작은 아들의 실랑이를 들먹이며 수업을 열어본다. 수업을 시작할 때는 앞으로 두 시간 어쩔까 싶은데, 달리고 달리다 보면 어느덧 수업을 끝내야 할 시간, 내가 준비해간 이야기들을 제대로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 진다. 바쁜 군 생활 가운데 책을 읽을 시간적 여유는 부족하고, 그래도 책을 통해 무언가 얻어가보겠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선다.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90도 각도의 인사로 이른 아침부터 달려온 미션이 마무리된다. 



이제 오늘 안에 집에만 도착하면 된다. 수업이 끝난 후 대중교통 하나 없는 동네에서 멍하니 있다가, 택시를 불러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부랴부랴 택시를 불렀다. 기차 출발 시간을 이십 분 정도 남기고서다. 그런데 느긋하신 운전사 아저씨, 세상에, 역이 저만치 있는 곳에서 '합승' 손님을 구하신다. '아저씨, 저 기차 늦는다구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저씨는 좋은 손님을 놓쳤다고 입맛을 다신다. 늦지 않을거라는 아저씨 장담, 그래 기차를 놓치진 않았다. 


어디로 갈까나~, 해지는 동대구역 옆의 백화점, 역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거기서 바라보는 대구의 풍경, 비로소 한숨이 내뱉어진다. 영천에 간다하자 경산에 사는 큰 언니가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 하셨다. 그런데, 열차 파업으로 내 시간이 유동적이 돼버리니 약속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는 그래도 영천까지 갔는데 어디를 좀 둘러볼까 라는 생각도 했었고, 동대구까지 와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는데 대구 거리를 유유히 걸어볼까 뭐 이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침부터 긴장 속에 영첨 행을 마치고 나니, 그 누구랑 말 한 마디 할 기운도, 어디를 둘러볼 여력도 남지 않았다. 그저 저녁을 먹는 식당에서 생맥주 한 잔을 시켜 긴 하루를 자축했다. 60먹은 나의 영천행을 기특하다며. 


두 시간 여를 지나 수서를 지난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사는게 막막해서 무장정 부산으로 떠났던 게 삼년 전인가, 같은 당일치기 여행인데, 부산과 영천 사이에 내가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다. 자정 즈음에야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에 집을 떠난 게 까마득하다. 똑같은 24시간인데 하루가 참 길다. 그러고 보면, 올 한 해 하루 하루가 참 길었다. 다 살아서 더는 무엇을 할 게 없다는 나였는데, 네 바퀴 달린 할머니 가방을 끌고 이 곳 저 곳을 분주히 보내고 있다. 끝인가 싶었는데 또 새로운 인생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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