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이 뭔데?
나를 잘 아는 친구가, 대도시의 사랑법에 나오는 재희가 꼭 나와 같다고 해서 보러갔다.
아니나 다를까, ㄱㅈㅎ에서 미친ㄴ으로 진화한 구재희의 서사는 나와 거의 동일하였고,
영화를 보는 내내 혹시 작감이 나를 도촬한 것이 아닐까 궁금했다.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에서 두 가지의 명사를 영화는 아주 정확하고 소스라치게 짚어낸다.
"서울에 집값이 얼만데!!!! 친구끼리 같이 살 수 있잖아요!!!!!"
"남자들이 집에 빨리빨리 들어가면 여자들이 더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지 않겠어요?"
"사랑은 보호필름 떼고 하는거야."
"나의 20대의 외장하드는 떠나갔다. "
대도시란, 모름직히 땅 값이 매우 비싸며 월세를 내기 벅차 캥거루족이 되버리는 청년들이 수두룩하고, 수험표를 떼었다가 버렸다가 급기야는 쓰레기통이 수험표로 넘쳐나지만, 나의 통장잔고는 0에 수렴하고 있는 장소이다.
또한 극 중 재희는, 사랑은 보호 필름을 떼고 하는 것이라며 흥수에게 이야기하고 다가오는 남자, 다가가는 남자 상관 없이 거침 없이 남자를 만나고 즐거워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배시시 웃는다. 또한 호모섹슈얼인 남성 게이친구와 동거를 하며 흥수에게, 너에게 나는 1순위잖아 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며 사랑을 표시한다. 재희에게 있어서 사랑법이라는 것은, 성애적 사랑과 순애적 사랑, 우정이 복합적인 사랑법인 것 같았다.
이 영화 속에서의 페미니즘 코드는 아주 강렬하다. 퀴어와 페미니즘은 마치 재희와 흥수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고 작감이 아주 유쾌하고 명쾌하게, 혹은 영화 속에 이리저리 숨겨놓았다.
빨간 치마를 입는 재희를 보고 구역질을 하는 흥수가 나오는 장면에서, 재희의 티셔츠에는 "Sisterhood is Strong"이라고 쓰여있으며,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재희의 인생에서는 데이트 폭력, 구속, 남친의 바람과 남탓하기 스킬, 팔로워 체크, 낯선 남자가 주는 술과 그 술에 탄 마약 등 요즘 여성들이 연애하면서 한 번 쯔음은 다 겪어보았을 사건이다. 또한 재희가 임신 중절 수술을 하려고 시도했을 때 자궁모형을 훔쳐 나오는 장면은 "나의 도둑맞은 자궁"이라는 문장과 일치하였고, 그것을 다시 훔쳐 책상 위에 올려놓는 모습... 그것은 흡사 "달갑지 않았던 나의 자궁과의 추억"을 곱씹으며 전투력을 증진시키는 여성들의 모습과 동일하게 보여졌다. 변호사 전남친과 헤어지는 씬에서 반지를 빼서 던지며 "헤어져 ㅆㅣ발."이라고 외치고, 가택침입에 데이트 폭력까지 자행한 전남친을 자궁 모형으로 거침없이 때리는 재희의 모습은 통쾌한 페미니즘과 동일하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클럽 팔찌가 세 개면서 학교는 꼬박꼬박 가고, 수업 끝나자마자 튀어나가 담배를 피우는 재희의 모습은 대학시절의 내 모습과 겹쳐보였다.
입고 싶은대로 입고,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면서 클럽을 학교보다 자주 가는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인스타로만 생존확인이 가능한 친구였으며... 담배를 끊을 바에 목숨을 끊는 것이 빠르다라는 생활신조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나의 모습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흡연을 하는 재희와 겹쳐보였다. (아마 내가 결혼식을 한다면.. 애프터파티 이후에 무조건 그렇겠지)
대학 내 성폭력 저항 대자보를 붙이고, 남학우들은 내가 붙여놓은 대자보를 떼면서 "미친년. 페미네. 이런게 뭐가.중요해" 했지만 얼굴 보면서 "씨발 그래서 뭐 어쩔건데요. 저한테는 존나 중요한데요." 라고 내뱉으며 저항과 투쟁의 대학생활을 한 나와 강의실에서 가슴을 대공개한 재희는... 존나게 비슷했다.
재희가 퍼피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동사보다 보고싶다고 하는 동사가 더 명확하다고 짚어낼 때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남자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꽤 많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렵고 모호한데, 만일 사랑의 지수를 1부터 100까지 수치화한다면... 내가 너에게 남자친구 직함을 주는 것은 나의 사랑 수치가 65이상을 넘겼을 때였을거야. 또한 우리가 독자적 연애관계로 묶여있다면.. 나의 사랑의 수치는 평균값을 80을 유지하도록 노력할거야. 만일 너가 어제는 30, 오늘은 60 같이 항상 사랑의 수치가 널뛰기한다면, 수치의 변화를 유도하는 요소를 나에게 미리 알려줄 수 있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두가 개정색하였으며,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한 사람은 여지껏 두 명 뿐이었다.
사랑은 명확하지 않으며, 사랑한다라고 하는 문장은 모호하며 주어와 목적어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지 않는가.
단언컨대, 나를 스쳐지나간 남자들은 나의 이름대신 미친ㄴ이라는 명사를 붙여주었을지도 모른다.
재희는 흥수에게 "너가 너로 사는게 뭐가 어때서" 그리고 "걔는 나한테 걸레라고 하는데, 뭐가 그렇게 쉬워.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라고 외친다.
속으로 정말 어...어... 나인데... 싶었는데 심지어 로케 장소가 우리 집 앞이라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덤이었다.
얼마 전 작별을 고한 N번째 썸남에게 보낸 나의 카톡 메시지는 재희가 다른 남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치할 지 모른다.
전자통신으로만 연락을 주고 받다가 만난 지 약 48시간 만에 나에게 사귀자고 질문하고, 그 자리에서 예 아니오로 대답해달라고 했던.... 배우기만 존나 배운 남자와의 마지막 대화는 나와 재희의 공통된 연애관을 대변할 것 같다.
나는 일단 오늘 당신이 보낸 장문의 카톡과 함께 있었던 짧은 그 순간동안 재밌었고 즐거웠던 순간에 대해 깊게 생각했고 고찰해봤어. 다만 오빠가 이해 불가능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범위의 intercultural 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으로서 맞춰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오빠가 보기에는 내가 선섹후사하고 클럽을 다니고,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내 모습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네. 조용히 떠나달라는 말도, 나는 뭔가 사람 대 사람간의 관계였다 라고 하는 것도 내 착오였나 싶고. 오빠랑 잘 맞는 사람을 만나서 예쁜 연애를 하기 바라.
해외에서 친구 집을 전전하며 생활했던 재희. 심지어 여성에, 유색인종까지 겹쳐진 정말 사회의 최저계급에 처해있던 재희는 그 배경을 통해 강인해졌고, 미친ㄴ 따위의 단어는 넘겨짚었으며 다만 사랑에 쉽게 빠져버리고 애정하는 1순위 흥수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고 선언하는 사랑인간이 되버리는 서사까지...........
내가 비록 미친ㄴ이고 걸레일지는 모르겠는데, 너하고는 안해. 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지만, 그 사랑의 대상은 성애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입을 빌고, 재희의 서사를 빌어서 남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한줄평 : 미친ㄴ은 매일 사고를 쳐도 스스로 수습은 하며, 누구보다 잘 살고,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