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을 닮은 기괴한 형태의 오브제들, 탁하고 불쾌한 색감, 기묘하고 섬뜩한 연출. 어느 모로 보아도 크리쳐물이나 코스믹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놀랍게도 한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다. 현재 케이팝 산업의 가장 강력한 슈퍼노바적 존재, 에스파의 정규 1집 타이틀곡 "Armageddon"의 이야기다.
1.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란
지금까지 이런 케이팝은 없었다. "아마겟돈"은 기존 케이팝의 방법론과는 전혀 다른 지점을 겨냥하고 있는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키워드는 '그로테스크'다. 그로테스크는 동굴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그로토(grotto)에서 유래된 용어로, 인간과 동식물 등이 기괴하게 결합된 형태를 묘사한 로마 시대 동굴 벽화로부터 출발했다.
비정상성과 불안정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때로는 혐오스럽거나 끔찍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이미 대중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케이팝의 영역에서 이를 가감 없이 구현한 에스파의 "아마겟돈"을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
2. 에스파와 혼합화의 미학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곤충의 날개를 닮은 화려한 메탈릭 오브제다. 이런 리퀴드메탈 질감의 아이템들은 그동안 에스파의 스타일링에 자주 사용되어 온 소재이지만 이번에는 그 목적이 명확히 '탈인간화'에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더듬이를 연상케 하는 왕관 모양의 헤드피스와 함께 나비의 윤곽을 구축한 뒤, 조명의 역광을 통해 윈터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실루엣 속에 감춤으로써 화면 속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기괴한 크리쳐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는 혼합화(hybridization)라는 그로테스크 미학의 중요한 방법론을 드러낸다. 그로테스크는 인간과 동물, 식물, 무생물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 각기의 요소들을 키메라처럼 접합한다. 인간의 상반신에 번데기의 하반신과 나비의 날개를 이어붙인 듯한 기괴한 형태를 드러내는 윈터의 샷은 곤충과 인간을 혼합하는 전형적인 그로테스크적 구성이다.
이를 서포트하는 에스파의 스타일링 팀은 헤어, 메이크업 등 전반적인 비주얼적 측면에서도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카리나의 경우, 에스파의 시그니처인 헤드피스뿐만 아니라 네일에도 디테일한 피스를 붙여 동물의 발톱과 같은 인상을 준다. 크리미한 하이라이터로 피부에 광을 주어 비현실적인 광택감을 만들어내는 메이크업 역시 치밀하다.
또한 팔과 어깨 부근에 여러 가지 주얼리를 붙여 마치 파충류의 피부와도 같은 묘한 질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닝닝의 경우, 그래픽적인 페이스 주얼로 한쪽 눈을 과감히 가리면서 불균형감을 주고, 반대쪽 눈은 속눈썹을 길게 빼고 흰색 마스카라를 두껍게 발라 곤충의 잔털과도 같은 모습을 만들었다. 곤충의 큐티클(외골격)을 연상시키는 울퉁불퉁한 질감의 네일 역시 그로테스크의 혼합화 원리에 부합한다.
3. 에스파와 왜곡의 미학
"아마겟돈"의 뮤직비디오에서 또 눈여겨볼 점은 사물의 형태를 왜곡시키는 메타모르포시스 (metamorphosis; 변형)의 기법이다. 에스파 멤버들의 형체가 녹아 없어지고 또다른 형태로 바뀌는 연출은 그로테스크 미학의 원리 중 하나인 왜곡(distortion)을 반영하고 있다.
해당 장면의 플루이드한 색감과 형태 표현은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화폭 위에서 구현한 현대미술가 함미나 작가의 화풍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장면에서는 닝닝의 얼굴 표면을 뭉개고 파충류의 외피와 같은 질감의 컴퓨터 그래픽으로 덧씌우기도 하는데, 이 역시 그로테스크가 즐겨 사용하는 왜곡 기법의 일종이다.
뮤직비디오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은 카리나의 신체가 부정형의 리퀴드메탈과 일체화되어 연체동물의 촉수처럼 움직이는 장면이다. 인체 형태를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괴물성을 과장하는 이 쇼트는 "아마겟돈"의 그로테스크성을 섬뜩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4. 에스파와 금기의 미학
지금까지의 모든 기획은 궁극적으로 그로테스크의 마지막 속성인 '금기의 위반(transgression)'을 정조준하고 있다. 에스파가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기괴한 이미지들로 인해 대중은 본능적으로 낯설고 불쾌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케이팝 산업에서는 절대적 금기에 가깝다. 당연하지만 대중음악의 제1목표는 거부감을 줄이고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파는 보란 듯이 케이팝에서 금기시되어온 것들을 분해하여 그로테스크의 미학으로 재조립한다.
간단한 예시로, "아마겟돈"의 티저 사진은 아이돌의 티저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모두 범한 작품이다. 강한 역광으로 인물이 어둠 속에 가려 멤버들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전반적인 실루엣도 걸그룹이라기보다는 괴기스러운 곤충과도 같은 형태로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당신이 이 사진을 보고 아이돌의 티저로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면, 에스파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준 셈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당신에게 심미감보다는 이질감과 당혹감을 선사하기 위해 이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에스파의 미학을 비로소 완성하는 것은 아이돌이 그로테스크한 것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매우 그로테스크적이라는 사실이다. 아이돌은 그 특성상 가능한 음악적 표현의 범위가 매우 한정적이며 대중적 고정관념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한계를 그로테스크의 조건으로 전유하여 무기화했다는 측면에서 "아마겟돈"의 방법론은 대단히 창의적이고 치밀하다.
5. 글을 마치며
그로테스크는 오랜 역사를 가진 강력한 문화적 코드다. 이미 그라임스(Grimes), 아니마(Anyma), 아르카(Arca) 등 전세계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그로테스크적인 테이스트가 녹아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케이팝의 영역 안에서 그로테스크 테마를 메인으로 활용한 첫 사례가 될 "아마겟돈"은 호불호를 떠나 기념비적인 시도로 남을 것이다. 뮤직비디오부터 헤어, 메이크업, 패션까지 모든 구성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찬란한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완성하고 있는 에스파의 새로운 정규 앨범은 분명히 올해 가장 충격적인 케이팝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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