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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빈 Jan 03. 2025

4세대 케이팝 음악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속성에 대한 연구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중심으로

지난해 다른 곳에서 작성한 소논문인데, 다소 길지만 브런치에도 올립니다.




1. 서론

 케이팝(K-pop)은 199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한국의 대중음악 장르로, 시대마다 독특한 특징을 지닌 여러 세대로 구분된다. 그 중 4세대 케이팝이란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아이돌 그룹들이 주도한 케이팝의 새로운 시대로 정의되며, 코로나 락다운이 형성한 디지털 미디어 환경과 가속화된 글로벌화의 양상을 통해 다양한 측면에서 이전의 케이팝과는 차별화되는 독특한 특징들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특히, 작곡과 작사로 대표되는 음악 프로덕션 면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대표적인 특징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사상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이러한 양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글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이론을 중심으로 4세대 케이팝 음악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속성, 특히 작곡법과 작사법에서의 변화를 분석하고자 한다.


2. 4세대 케이팝 음악의 작곡법: 깊이 없음과 표면화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깊이 없음(flatness)"의 시대로 규정했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문화가 더 이상 전통적 내러티브나 심층적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표면적이고 감각적인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는 특성을 나타낸다. 제임슨에 의하면 “깊이 없음”의 속성은 전통적 서사와 상징적 의미의 해체에서 비롯되며, 문화적 생산물이 이제는 단순히 소비 가능한 시각적·청각적 기호로 기능한다. 현대 문화는 더 이상 어떤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나 철학적 질문을 전달하지 않으며,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깊이 없음” 개념을 예술 영역에서 구현하는 핵심적 기법으로 패스티시(pastiche)를 지목하며, 이를 “역사적 양식의 풍자 없는 모방”으로 정의한다. 패스티시는 과거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재구성하지만, 모더니즘 예술의 패러디 (parody) 기법처럼 원본의 맥락이나 의미를 비판적 관점에서 활용하지 않고 그 표면적 양식만을 단순한 미학적 자원으로 상품화한다.


 앤디 워홀의 작품 <마릴린 딥티크(Marilyn Diptych)>는 패스티시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대표적 사례다. 배우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배열한 이 작품에서 먼로의 이미지는 단지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스타일로 활용된다. 현실 세계의 먼로라는 구체적 개인이 가진 서사나 그녀가 상징하는 문화적 메시지는 제거된 채 그 표면만이 상품적 기호로 전유된 것이다.

 4세대 케이팝 음악의 작곡법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깊이 없음’이 반영되어 있는데, 타 장르의 사운드만을 패스티시적 방식으로 차용하는 작곡 기조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양한 음악 장르를 하이브리드적으로 흡수하며 발전해 온 케이팝의 작곡 역사에서 타 장르의 활용은 이미 익숙한 소재다. 예컨대 1세대 아이돌인 H.O.T.는 붐뱁 힙합을 기반으로 한 <전사의 후예>로 데뷔했으며, 2010년대 중반 3세대 아이돌 시대에는 트로피컬 하우스 장르가 케이팝의 주된 질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 차용은 여전히 해당 장르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었다. 모든 음악 장르는 고유의 역사적·문화적 맥락과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흑인 하류층 사회에서 발생한 붐뱁 힙합은 인종차별과 폭력 등의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된 장르로, 이를 차용한 H.O.T. 역시 학교 폭력을 비판하는 가사를 통해 그 역사적 맥락을 반영했다. 트로피컬 하우스 역시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여름 휴가철의 상쾌하고 신나는 분위기를 표현하는 EDM 장르로, 태연의 <Why>와 같은 케이팝 곡들은 해당 장르의 사운드뿐만 아니라 동일한 주제의식을 담은 가사를 통해 이러한 맥락을 충실히 재현했다. 이는 단순히 장르의 사운드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르가 지닌 역사적·문화적 함의와 주제까지 수용한 결과였다.

 4세대 아이돌 시대에 들어서도 다양한 하위 장르를 차용하는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 각각의 아이돌 그룹은 자신들만의 음악적 세계를 구축하는 중심축으로 하나의 장르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디스코그래피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오히려 그 기조가 더욱 보편화되어, 현재 활동하는 4세대 아이돌 중 장르적 정체성이 모호한 팀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 예시로, 에스파는 하이퍼팝, 르세라핌은 라틴, 아일릿은 플럭앤비 등의 장르를 시그니처 사운드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은 대상 장르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배제한 채, 표면적 외피인 ‘사운드’만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뉴진스의 히트곡 <Ditto>를 들 수 있다. 이 곡은 볼티모어 클럽 장르의 드럼 구조와 리듬을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재현했지만, 장르의 서사적 맥락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원류 볼티모어 클럽의 주제의식은 흑인 사회의 고달픈 현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Ditto>의 가사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와 늦겨울의 애틋한 감성을 강조한다. 볼티모어 클럽의 브레이크비트 사운드를 악곡의 뼈대로 차용하면서도, 서사와 주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풀어나간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힙합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 드릴(Drill) 역시 케이팝에 차용되며 원류의 맥락에서 벗어난 사례로 특기할 만하다. 드릴은 시카고의 갱단 래퍼들로부터 시작된 장르로, 폭력적이고 노골적인 가사를 특징으로 한다. 장르명인 ‘드릴’ 자체가 총격과 칼부림, 혹은 갱단의 삶을 의미하는 흑인 사회의 은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를 잔혹하게 묘사하거나 예고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걸그룹 스테이씨는 <I Want U Baby>, <I Wanna Do>, <LIT>  등 다수의 곡에서 드릴의 독특한 사운드와 리듬을 차용하면서도 낭만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을 주제로 가사를 풀어나갔다. 이는 원류 드릴의 폭력적이고 암울한 주제의식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케이팝의 패스티시적 작곡 방법론에 의해 장르의 역사적 맥락과 의미가 제거된 또다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4세대 케이팝의 작곡법은 타 장르의 스타일에서 그 의미와 맥락을 탈색시키고, 케이팝 음악을 과거의 장르적 전통과 상징적 의미로부터 유리된 상품으로 변환한다. 이러한 접근은 글로벌 대중음악 시장에서 케이팝이 초국적 감각과 유희를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차용된 장르의 본래적 서사와 정체성을 탈맥락화함으로써 그 의미를 재구조화하고 해체한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 환경 속에서 대중음악이 서사와 맥락보다 감각적 경험과 표면적 쾌락에 더욱 집중하는 ‘깊이 없음’의 예술로 재구성되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3. 4세대 케이팝 음악의 작사법: 서사 붕괴와 정신분열증적 희열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분석하며 ‘서사의 붕괴(disruption of narrative)’와 ‘정신분열증적 희열(schizophrenic euphoria)’이라는 개념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문화적 특성을 설명했다. 이는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의 해체와, 조각난 정보와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쾌감을 중심으로 한다.

서사의 붕괴란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시간적 연속성과 인과관계가 사라지고, 대신 분절된 사건이나 이미지의 조합으로 대체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모더니즘에서 강조되던 깊이 있는 내러티브와 의미의 추구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상호 연관 없는 단편들의 병치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제임슨은 이를 "역사적 시간의 종말"로 간주하며, 시간적 연속성이 상실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현재의 영속성" 속에 갇혀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분열증적 희열은 이러한 서사 붕괴의 맥락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단편적인 이미지와 메시지가 끊임없이 전환되며 관객에게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쾌감을 제공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서사가 파편화되고 연속성을 잃게 되면, 독자는 더 이상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맥락 속에서 경험을 조직하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경험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몰입은 파편화 자체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해방적이고 쾌락적인 순간을 제공하며, 기존의 근대적 예술과는 다른 형태의 만족감을 제공한다.

 미국의 시인 밥 페럴먼의 시 <중국>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페럴먼의 시는 전통적인 시들처럼 통일된 서사나 감정적 흐름을 따르지 않고, 대신 바람, 태양, 비행기, 우산, 인형과 같은 불연속적 이미지들의 나열로 구성된다. 이렇게 파편화된 시적 기법은 단일한 내러티브를 전개하지 않으며 단절된 개별 이미지들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충격을 유도한다. 동시에 사건의 인과관계나 서사적 흐름을 포기하고 각각의 구절이 독립된 경험으로 기능하며 조합적 의미를 독자 스스로 창조하도록 유도한다.

 4세대 케이팝 음악의 작사법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최근 케이팝의 가사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에서 벗어나 감각적이고 파편적인 텍스트로 구성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작사는 독자나 청자가 내러티브의 전체적 의미보다는 단편적인 순간과 이미지를 경험하도록 한다. 오늘날의 케이팝 가사는 이제 메세지와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표면적 발음과 어감을 통해 감각적이고 추상적인 쾌감을 제공하는 도구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Look it's a new me
Switched it up, who's this?
우릴 봐 NewJeans
So fresh, so clean

얼마나 기다렸던 날
드디어 Time to step out
또 한 번 더 Ready for sure
To have some more

New hair, New tee,
NewJeans, Do you see?
New hair, New tee,
NewJeans, Do you see?


 2023년 발매된 뉴진스의 노래 <New Jeans>는 4세대 케이팝의 작사법이 지닌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전통적인 서사적 구조를 따르지 않으며, 내러티브적 일관성을 형성하기 위한 문맥적 연결성이 부재한다. 대신, 감각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개별 이미지들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며 가사의 각 구절이 서사적 맥락보다는 순간적인 쾌감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New Jeans>의 가사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단어들의 음향적인 질감이다. 예컨대, "New hair, new tee, NewJeans, do you see"라는 훅은 의미적으로는 연결성이 미미한 단어들의 나열일 뿐이지만, /n/, /j/, /s/와 같은 부드러운 자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만들어내는 발음의 리듬과 균형감을 통해 청자가 소리의 흐름에 몰입하고 청각적 자극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가사를 구성하는 각각의 단어들은 서사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구성하지 않아도 소리 그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케이팝이 새롭게 맞이한 숏폼 콘텐츠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짧은 시간 안에 청중의 주의를 끌고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숏폼 플랫폼에서 발음이 형성하는 강렬한 리듬과 인상적인 어감은 서사적 흐름보다 훨씬 효과적인 도구로 작동한다. 이는 청중이 가사를 통해 내러티브적 맥락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각 구절이 제공하는 감각적 희열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 경험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케이팝 속에서 제임슨이 언급한 ‘서사의 붕괴’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가 사라지고 개별적인 단어와 이미지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파편적 가사로 나타난다. 동시에 ‘정신분열증적 희열’은 가사가 서사적 의미 대신 발음과 어감 등의 표면적 요소에 집중하며 텍스트 그 자체로 소비되는 양상 속에서 드러난다. 이는 단순한 음악적 트렌드의 변화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 환경이 만들어낸 새로운 콘텐츠 소비 방식이다. 결론적으로, 4세대 케이팝 음악의 작사법은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현대 케이팝의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4. 결론 

 4세대 케이팝의 작곡법은 다양한 음악 장르를 패스티시적으로 차용하고, 이를 통해 장르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탈색시키며,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쾌감을 제공하는 형태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제임슨이 말한 ‘깊이 없음’의 예술로, 더 이상 내러티브나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순간적인 감각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주력하는 현대 문화의 흐름을 반영한다.

 또한, 4세대 케이팝의 작사법은 전통적인 서사적 구조를 해체하고, 파편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서사의 붕괴’와 ‘정신분열증적 희열’을 구현하였다. 이는 현대 대중음악에서 나타나는 텍스트의 소비 방식의 변화를 대표하며, 대중이 가사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발음과 어감, 리듬에 몰입하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적 경험을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4세대 케이팝은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 환경 속에서 등장한 중요한 음악적 현상으로, 기존의 양상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창작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본래의 맥락을 제거하고 감각적인 쾌감과 파편적 서사에 초점을 맞추는 특징은 오늘날 케이팝이 대중음악으로서 소비되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 이 글은 4세대 케이팝이 지닌 이러한 특징을 조명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적 요소가 대중음악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작은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5. 참고문헌

도니언. "제21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K팝 후보 살펴보기." 네이버 블로그, 2024년 12월 3일. https://blog.naver.com/gusl249/223360176664.

빈즈. "힙합을 넘어 흐름으로, Drill(드릴)." 브런치, 2024년 12월 17일. https://brunch.co.kr/@bbeans/34.

제임슨, 프레드릭.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22.

제임슨, 프레드릭.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2012. https://web.education.wisc.edu/halverson/wp-content/uploads/sites/33/2012/12/jameso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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