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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Mar 16. 2023

나무꾼 기욤의 단짝 '닐'

  계절도 우리처럼 이삿짐을 챙겨 어디론가 떠나고 새로 입주하는 요즘 같은 때나, 누군가와 마주앉아 이야기꽃을 피워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스산한 날, 또 여기저기서 만나는 강아지들이 마냥 사랑스러울 때 습관처럼 펼쳐보는 잡지가 있다. 한국판 GEO 2004년 10월호, 100~121 페이지. 지오는 ‘세계를 보는 눈’이란 모토를 앞세우고 지구상에서 일어난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지오가 모르는 세상은 없구나, 싶을 정도로 아프리카에서 남극까지 구석구석 살피며 인간, 자연, 역사, 기후 등등의 겉과 속을 들여다본다. 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이 발품을 팔고, 자료를 수집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깊고 짜임새 있는 ‘서사’에 곁들인 화보의 맵시 또한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국판 지오를 내게 선사한 이는 대학 후배였다. 대학 졸업 후에도 후배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는데도 후배가 어른스럽게 꾸준히 나를 챙겼다. 내가 소설을 써보겠다고 외로이 끙끙대던 시절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먹으라며 박스에 주전부리를 한가득 담아 택배로 종종 보내줬다. 그해 서점에서 근무했던 후배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이건 아니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 그걸 보충해줄 이런저런 계획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린 결단이었다. 어느 날 후배 집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연두색 잡지 지오를 보면서 탐냈더니 후배가 “눈독 들이지마!” 하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100권 가까이 되는 잡지에 대한 나의 ‘탐욕’이 내내 마음에 남았는지 후배가 한국을 떠나면서 지오를 화끈하게 안겨줬다.  


  100121 페이지

  나무꾼 기욤이 뭉툭한 손으로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다. 왼쪽, 오른쪽, 앞으로, 뒤로, 한발씩! 탄력적인 명령어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특히 갈기가 매력적인 짐말 닐과 호흡하다 보면 기욤의 하루는 금세 저문다. 열두 살 때부터 짐말을 부린 기욤은 어느덧 일흔 살이 넘었다. 기욤과 닐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함께 아침을 먹는다. 언젠가 기욤이 병원에서 말 알레르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천식을 치료하려면 당장 말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에 그는 “선생님에게 환자 알레르기가 생긴다면 당장 의사 노릇을 그만두시겠습니까?” 라고 되물었다. 기욤의 마지막 소망은 생명력이 가득한 숲을 돌아다니다 평생 단짝으로 살아온 닐의 등에서 죽는 것이다. 

  벨기에 남부 왈로니아 지방의 숲속에서는 나무꾼을 주인으로 삼은 짐말들이 활기찬 동작으로 목재를 모은다. 왈로니아에서 짐말과 짝을 이뤄 오래된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 나무꾼은 60여 명이다. 이들에게 짐말은 더없이 소중한 삶의 동반자다. 아르덴 숲에서 목재를 모으며 살아가는 나무꾼들에게 건강한 말은 그 어떤 최첨단 기계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숲속에서만큼은 말이 기계보다 한수 위다. 트랙터가 숲을 훑고 나면 주변의 나무뿌리들이 상처를 입는데 반해 말은 나무들이 다치지 않도록 걸음을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꾼들은 짐말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기계를 활용하는 것에 비해 열 배나 되는 비용이 들면서도 나무꾼들은 짐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 아르덴 짐말은 벨기에 남부에 있는 아르덴 고원을 중심으로 서식해 왔다. 힘이 세고 쉽사리 지치지 않으며, 얌전하지만 언제나 힘이 넘친다.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었을 당시 동원했던 말이기도 하다. 

  새벽안개가 빛처럼 내려앉은 숲, 우뚝 솟은 전나무들 사이로 밑동이 잘린 목재가 끝없이 누워 있다. 나무꾼들은 이미 벌채한 나무들을 숲 밖으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한다. 크레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절벽이나 둑 아래서 행해지는 고달픈 노동은 꼭두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진다. 민첩하고 힘이 세며 끈기가 강한 말은 나무꾼들의 빼어난 동업자다. 지오 100페이지를 펼치면 전면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꾼 기욤이 한쪽 다리를 쭉 뻗은 채 짐말 닐과 목재 사이에 줄을 매달고 있는 중이다. 책장을 넘기면 수염이 더부룩하게 자란 기욤이 장작불을 쬐면서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다. 닐도 전나무 앞에 서서 뭔가를 먹는다. 이 대목에 이르면 나도 얼른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가져온다. 잡지 안과 밖에서 움직이는 우리 셋은 이 시간이면 한데 어울려 커피도 마시고 쿠키도 먹는다. 반들반들 빛나는 까만 커피, 그 쌉쌀한 맛이 내 머릿속을 맑게 해준다. 나, 기욤, 닐이 내쉬는 숨소리가 실감나게 들려오는 나른한 오후, 또는 어둠이 활짝 날개를 편 한밤중. 

  나의 눈은 나무꾼과 짐말의 일상을 다룬 100~121 페이지에서 생기롭게 움직인다. 매번 읽을 때마다 그런다. 과감하게 배치한 사진들을 보면 “닐, 이리 와, 밥 먹자!” “다리에 좀 더 힘을 줘!” 라고 외치는 기욤의 목소리가 정겹게 들려오는 것 같다. 무신론자인 기욤은 최근 닐의 마구간에 십자가를 걸어뒀다. 최근 병을 앓은 뒤 원기를 회복하지 못하는 닐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2004년 10월호 지오를 가까이 두고, 100~121 페이지를 수시로 펼치면서 기욤과 닐을 만날 때면 김기택의 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 자연스레 떠오르곤 했다.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라도 하듯 

  야오옹, 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터지는 제 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킨 제 모습에 화가 난듯 

  고개를 숙이더니

  굽은 등으로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동안 멀어져갔다. 


  기욤과 닐의 돈독한 우정, 그리고 김기택의 ‘그와 눈이 마주쳤다’를 머릿속에 담고 있으면 자주 푸석푸석해지는 삶을 어루만져줄 동반자가 꼭 인간이어야 할까 라는 의문이 반딧불처럼 날아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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