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설원 Mar 31. 2023

8달러에 생화 두 다발

  해마다 대학의 봄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과 함께 꼼꼼히 살펴보는 작품들이 있다. 그건 바로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이다. 예비 소설가에서 진짜 소설가로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해주는 원고지 80매 내외의 이야기들. 내가 담당하고 있는 문예창작과 학생들도 ‘신춘문예 철’이 되면 설렘과 긴장 속에서 소설의 집을 짓다가 허물며 보수 작업에 여념이 없다. 12월 중순쯤 들려오는 등단 소식. 내가 지도한 학생이 등단의 열매를 수확하면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최종심에 올랐는데 아쉽게 떨어졌어도 등단한 것 못지않게 기쁘다. 그만큼 소설 쓰기가 어렵고, 그런데도 쓰려는 사람이 많아, 등단/ 최종심까지 올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운도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등단을 ‘문학고시’라고 부른다. 물론 등단만을 떠받드는 건 아니다. 굳이 데뷔하지 않고도 달콤하게 익은 글들을 쓸 수 있다. 출간의 폭도 넓어졌다. 그야말로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각 신문사의 홈페이지에 ‘신춘문예 작품 공모’가 뜨면 문학도들은 꿈의 폐달을 밟기 시작한다. 나도 학생들의 작품을 첨삭하면서 덩달아 문학축제를 즐긴다. ‘등단’을 떠나 이만큼 멋진 도전이 있을까 싶다. 


  몇 해 전 어느 일간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 1위는 ‘사랑’이었다. 2위는 ‘안녕’, 3위는 ‘아름답다’, 4위는 ‘별’이다. 보기만 해도 예쁜 단어들을 눈으로 만져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매체를 통해서 당선된 작품들에는 이것이 쏙 빠져 있구나. 사랑, 안녕, 아름답다, 별. 때문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대개 아프고, 쓸쓸하고, 서글프고, 고통스럽다. 그들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심사위원은, 언제부턴가 응모작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사랑 이야기가 없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의 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살아내기가 버겁다는 뜻이겠지. 

  올해도 어김없이 3월 한 달 동안 2023년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들여다봤다. 중앙지든 지방지든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작품을 골라 학생들에게 읽혔다. 무슨 일로 상처를 받았거나, 어떤 결핍이 있는 인물들이 지면 위를 힘없이 걸어 다녔다. 현대소설은 누군가의 ‘불안과 욕망’에 대한 서사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올해 눈여겨본 당선작들 속에도 건강한 사랑, 안녕, 아름답다, 별은 없다.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야하지 않겠느냐는 신인 작가의 목소리만 간절히 들려올 뿐이다. 


  1. 사랑: <휠얼라이먼트>

  10대 후반, 아니면 20대 초반의 남녀가 소설을 이끈다. 재이는 중등부 육상선수였는데 지금은 정비공으로 일한다. 그의 곁을 지키는 ‘나’는 말을 느리게 하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돌려버린다. 정비소 사장의 말마따나 이들은 요즘 애들 같이 바쁘게 살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고, 학교도 안 가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그저 체념한 듯 ‘머물러’ 있을 뿐이다. 욕구, 욕망, 욕심, 이 ‘3욕’이 증발한 허수아비 같은 재이와 ‘나’. 이들의 나이가 푸릇푸릇하기 때문에 더 문제적이다. 이들이 주고받는 연극적인 대사 때문에 연극 무대가 떠오르면서, 끝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이 아른거린다. 나는 이들에게서 ‘사랑’의 결핍을 진하게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모성의 수액을 충분히 받아먹지 못한 인물들. 그래서 재이와 ‘나’의 일상은 푹 잠겨 있어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모습인데도 퍽 불안하다. 


  2. 안녕: <쥐>

  소설 첫머리부터 흥미를 끈다. ‘해군관사단지’라는 신선한 공간 때문이다. 해군관사단지는 영관급 관사와 위관급 관사로 나뉜다. 남편의 계급에 따른 구분이다. 남편들이 구축함을 타고 바다로 떠나면 여자들은 영관급 관사 주변의 분수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들의 위치도 남편들의 임관 기수에 따라 달라진다. 관사에서는 관사의 규칙대로 움직여야 한다. 비난과 따돌림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윤진의 남편은 몇 개월에 한 번씩 J시로, G시로, P시로 발령을 받는다. 때문에 이사를 밥 먹듯 한다. 윤진의 남편은 배를 타면 짧게는 석 달, 길게는 육 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여자들의 사정도 똑같다. 이 소설에는 은폐, 비밀, 의혹, 감시, 의심이 농밀한 안개처럼 깔려 있다. 남편들의 잦은 발령 탓에 ‘안녕’이란 인사를 누구보다 많이 하는 여자들. 하지만 그 ‘안녕’은 차갑고 불순하다. 


  3. 아름답다: <펭귄섬>

  인구 삼천 명도 되지 않는 낙도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방송국의 예능 프로그램 덕분이다. 진행자가 어떤 퀴즈를 냈는데 그 답이 ‘펭귄’이었다. 카메라가 어판장에 세워진 펭귄동상을 보여줬다. 방송이 나간 직후 관광객들이 훼리호를 타고 몰려들었다. 펭귄동상은 검은색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맨 근사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섬은 점점 부촌이 되어간다. 펭귄섬의 주민들은 탐욕스러워지고, 서로 ‘원조’를 외치며 그악스러워지고, 이제는 물건을 파는 자리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인에게 배신을 당하고 펭귄섬으로 들어왔던 외삼촌은 다시 인간의 횡포에 떠밀리듯 섬을 떠난다. 정보 홍수의 시대, 다양한 채널, 그로 인해 구석구석 상업적으로 물들어가는 각양각색의 공간들. 펭귄섬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4. 별: <낮에 접는 별>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오버랩 되는 소설이다. 주인공 홍주는 ‘삶을 아는 인문학 원데이 클래스’라는 무료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강사의 사정으로 강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그 강의실에 있던 동우, 선린과 한때를 보낸다. 초면인 그들을 심리적으로 가깝게 만든 공통분모는 ‘죽음’이다. 홍주의 아버지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질주하다가 교통사고를 냈다. 노인은 죽지 않았지만 뇌사 판정을 받았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다. 최근 동우는 유일하게 의지했던 친형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선린의 개인사는 불투명하지만 그녀의 삶도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상징적인 행위는 ‘종이접기’다. 소설에서 감초 역할을 하는 동우가 티슈로, 또 빵 비닐봉지로 별을 접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삶의 벼랑에 매달려 있는 홍주가 동우에게 별을 접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한다. 이들의 ‘별’은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어떤 꿈과 추억과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별이 아니라 낮에 빵 봉지로 접는 별이다. 이들의 삶을 지탱해줘야 하는 별은 가물가물 스러지려 한다. 그래도 홍주가 빵 봉지로나마 별을 접으려는 의지를 보여서 다행스럽다.  


  3월의 마지막 영화는 <오토라는 남자>였다. 아직까지 실망시킨 적이 없는 톰 행크스의 연기력을 믿고 영화관을 찾았다. 63세 오토는 6개월 전 아내를 잃었다. 학교를 설득해 보충반을 만들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시험지 채점을 하고, 책을 읽던 아내. 오토도 이제 그만 아내를 따라가려 한다. 오토는 고지식하고 원칙주의자다. “동네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투덜대면서 아침마다 단지를 순찰하고 다닌다. 불법 주차에 분노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민들을 타박하고, 알바생들이 아무렇게나 던지고 간 광고 전단을 줍는다. 오토는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머저리’ 같은 이웃 때문이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오토의 첫 번째 자살 시도다. 오토는 잡화점에서 밧줄을 구입해 천장에 고리를 만들어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한다. 죽은 후를 대비해서 거실 바닥에 신문 여러 장을 깔아 놓는다. 드디어 밧줄에 목을 매고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 고리가 뚝 끊어진다. 거실에 나자빠진 오토가 일어서려는데 신문 광고가 눈에 띈다. ‘8달러에 생화 두 다발’, 오토는 생화 두 다발을 사들고 아내의 무덤을 찾아간다. 울적한 표정으로 아내 앞에서 속엣말을 꺼내며 추억에 젖는 오토. <오토라는 남자>는 우리시대에 함량 미달로 떠도는 사랑, 안녕, 아름다움, 별이 담뿍 스며든 영화다. 오토의 유서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 고양이는 하루에 밥을 두 번 먹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네. 존중해 주게.’

작가의 이전글 나무꾼 기욤의 단짝 '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