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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설원 Apr 28. 2023

경주의 명장면

작년 여름, 우리집 베란다의 참외꽃

  오랜 서울살이에 일단 마침표를 찍고, 그해 여름부터 경주의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 두 달 후면 꽉 찬 2년이다. 그 시간은 휙휙 지나갔다. 이 세월의 속도는 허무감이나 부질없음 같은 감정을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깨달음과 충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면서 빈틈없이 직진했다. 깐깐하고 야멸찬 시간 앞에서 이런 여유를 부려보기도 처음이었다. 내가 시간을 상대로 만만하게 구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 경주에서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건물들이 우쭐거리며 뽐내지 못한다. 애초부터 쉽게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어느 땅에서 왕관이나 장신구, 토기가 쏟아져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라 산과 나무와 들판이 욕심껏 쌕쌕 숨을 쉬면서 그 모습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딜 가든 그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때마다 ‘이 도시는 산과 나무가 제대로 행세를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연의 생생한 숨결을 양껏 섭취하며 나는 시간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내 안에 수시로 까만 씨앗을 심어놓는 듯한 환상적인 기분에 젖어 들면서.  

  경주살이의 기쁨 중 하나는 산지 과일을 저렴한 값으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주 인근에 과수 농가가 많아 탐스럽기 그지없는 사과, 복숭아, 참외, 포도, 자두를 철마다 집에 들여 내 입이 호사를 누린다. 어느 과일이 제 철을 만났을 때 장에 가면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진다. 지난 여름, 5일장을 구경하러 갔는데 저만치에서 노란 물결이 넘실거렸다. 뭐지? 빨려들 듯 다가갔더니 빛의 덩어리 같은 참외가 너른 바닥에 쌓여 있었다. 손님이 오면 젊은 농부가 투명한 비닐에 참외를 가득 담아줬다. 도시에 비하면 거저나 마찬가지인 돈을 받고서. 당연히 나도 샀다. 

  이것저것 양손에 들고 귀가하자마자 참외부터 깎아 먹었다. “맛있다!” 라는 감탄사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단단하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입 안에 가득 퍼지는 향기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참외를 먹고 보니 접시에 오동통한 씨앗들이 끈끈하게 엉켜 있었다. 버리기가 아까워 그냥 재미로 참외씨를 작은 화분에 심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흘쯤 지나 무심코 화분을 봤더니 흙이 들려 있었다. 안에서 무언가가 흙을 툭툭 건드리듯이. 흙에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화분에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아, 새싹이었다. 참외씨에서 발아한 여린 새싹들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아 흙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하면서 낑낑대는 모양새였다. 참외씨는 먹거나 버리는 줄만 알았는데 싹을 틔운다고?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참외의 신생아적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웃자란 새싹들 곁에서 또 다른 씨앗이 꿈틀대고 있었다. ‘너희들은 먹거나 버리면서 우리를 괄시했지. 우리도 엄연히 씨앗인데 말이야. 햇빛과 물을 먹여주면 누구보다 빨리 싹을 틔우는 씨앗이라고’, 이런 말들이 와글와글 들려왔다. 새싹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면서 줄기와 잎이 생기더니 마침내 노란 꽃을 피웠다. 하지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오면서 참외씨 가족은 시들시들해졌다. 풍성하던 화분은 볼품없이 변해갔다. 내 눈과 마음에서도 점점 멀어졌다. 겨울이 되자 화분에는 푸석푸석한 흙만 남았다. 


올해 봄, 참외씨 새싹


  오늘 아침 유별나게 햇살이 싱그러워 베란다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가만히 하늘을 쳐다봤다. 햇살이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햇살이 내 마음속에 침입한 나쁜 균까지도 없애주기 바라며 가슴을 활짝 폈다. 아차, 너희들도 햇살을 먹어야지. 베란다의 식물들에게 햇살을 양보하려고 비켜서는데 외톨이처럼 베란다 구석에 놓여 있는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갔다. 이 화분에서 뭐가 자랐지…… 순간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무슨 작전 모의하듯 쉬쉬하면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대로 앉아 가까이 들여다봤다. 어머, 새싹들이 흙을 뚫고 나왔잖아! 이게 무슨 새싹일까…… 뜻밖의 탄생에 설레면서 곰곰 생각해보니 이 화분은 작년 여름 참외씨가 살던 집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여름에 미처 싹을 틔우지 못한 참외씨가 흙 속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빛을 봤나? 내가 이따금 건네주는 물을 받아먹고서? 그것이 참외씨의 화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다른 화분에 물을 줄 때 한 모금 나눠줬는데 그 보답을 이렇듯 멋지게 할 줄이야. 나는 두 손으로 화분을 감싸 쥐고 오래 눈을 맞췄다. 작년 여름과 올해 봄, 우리 집 베란다에서 펼쳐지는 참외씨의 일생. 내가 첫손으로 꼽는 경주의 명장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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