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30분이면 창문 너머 ‘예쁜음 클래스’에서 피아노와 플루트 소리가 번갈아 들려온다. 처음에는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따지려고 했다. 독서실 가까이에 피아노 학원이라니. 하지만 J는 속으로만 투덜대다 말았다. 불만을 내세워 봤자 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무엇보다 독서실을 다녀보니 이렇듯 무관심한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1989년에 준공한 아파트의 독서실은 언제라도 썰렁하다. 한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 적자 공간. 반면 예쁜음 클래스는 심심찮게 수강생들이 드나들어 최고령 아파트의 공기 청정기 역할을 해줄 테니 당연히 대우가 다르겠지. 관리사무소 입장에서 보면 독서실이야 언제든지 폐쇄해도 그만이지만 예쁜음 클래스는 한껏 비위를 맞추며 곁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어설픈 피아노 연주가 독서실의 고요를 깨트린다. 오늘도 정확히 오후 2시 30분에 누군가의 연습이 시작됐다. 한 박자도 놓치지 않으려는 신중한 손놀림이 이제 그렇게 거슬리진 않는다. 악기들이 내는 소음도 독서실의 일부려니 하며 받아들이니까 오히려 이 분위기가 자연스럽다. 한 소절이 끝났다. 다시 이어지는 선율, 바로 플루트가 합세할 것이다.
두 악기가 한 몸으로 흘러갈 때 독서실의 출입문이 열렸다. 마음껏 벌리고 있던 다리가 저절로 오므려진다. 조심성 없이 신발을 벗는 방문객, 분명 뜨개질미녀일 것이다. 그녀는 독서실에 들어서면 일단 한숨부터 내쉬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J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 왼쪽으로 세 번째 자리가 그녀의 방이다. 뜨개질미녀는 해사하다. 긴 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렸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가녀린 목선이 친근하게 와 닿는다. 누군가와 다정한 악수를 했을 때 느껴지는 온기처럼. 그녀는 독서실에서 뜨개질을 한다. 처음에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며 짬짬이 즐기는 그녀만의 스트레스 해소용 놀이인 줄 알았다. 어느 날 독서실에 혼자 있을 때 그녀의 사물함을 슬쩍 열어봤다. J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색색의 털실과 대바늘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물찾기 시간이고, 일행과 동떨어져 숲속을 헤매다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뜨개질미녀는 ‘통마늘진액’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쪽쪽 빨아먹는다. 그녀가 독서실에 입장하고 한 시간 정도 지나면 J는 꼭 환풍기를 튼다. 목적은 공기 정화가 아니라 뭘 뜨는지 궁금해서다. 환풍기를 작동시키려면 그녀의 자리를 지나쳐야 하는데 J는 그때마다 슬쩍 곁눈질한다. 하지만 그녀의 뜨개질 솜씨는 아마추어 수준이라서 털실로 틀을 잡아가는 그것이 스웨터인지 조끼인지 알 수가 없다.
착잡한 심정으로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독서실은 아파트 상가 이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J는 정확히 22개월 전, 평수를 최대한 줄여 이 아파트에 둥지를 텄다. 낡고 비좁았으나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병자를 온전히 떠맡아야 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새로 이사한 아파트 단지 안에, 또 그 주변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심장과 뇌가 형편없이 망가져 어쩔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날리 없으니 집이 아니라 요양병원에서 아버지는 임종을 맞이할 것이다. 그날 J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고 나서 딱 한 달만 일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만기가 다가오는 적금이 큰 결심을 하게끔 도와줬다. 그동안 수시로 아른대던 유혹을 애써 뿌리치며 지켜낸 적금이었다. 마침내 요양병원의 환자로 이름을 올린 아버지. 간병 전쟁이 시작됐으니 무엇보다 정신적 식량을 비축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터였다. 눈자위가 퀭하게 꺼진 아버지의 얼굴이 걸핏하면 떠올라 J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 섬뜩한 형상을 지우려고 ‘스스로에게 기꺼이 허락한 휴가 동안 무엇을 할까’, 이것만 생각하다 독서실을 만난 거였다.
독서실은 뜻밖에도 텅 비어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랬다. 어쩌다 나타나는 주민들의 입실 시간은 대개 정해져 있어서 그 때만 피하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긴 누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래 봤자 한두 명이었으니까. 하루하루 발걸음하다 보니 독서실의 적막이 마음속에 안정감이라는 싹을 돋게 해줬다. 휑한 집과 휑한 독서실,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니다, 그 차이는 크다. 아버지의 흔적이 있느냐, 없느냐. 독서실에 가만히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건성건성 뭔가를 읽고, 종종 자기 설움에 울컥해서 책상에 엎드리면 외딴섬에 유배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고, 어떤 부양의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이대로 늙고 싶다는 소망까지 피어올랐다.
J의 뒷자리에 앉는 남자가 오늘은 어째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아침 9시에 등장해서 독서실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책과 씨름한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어디로 나가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오면 항상 토막잠을 잔다. 또 뜨개질미녀처럼 건강식품을 빼놓지 않는데 그건 환약 모양의 ‘흑마늘’이다. 이 독서실에서 지내려면 반드시 마늘을 먹어야 한다는 조건을 따르듯이. 그래서 J도 ‘참참마늘크루아상’을 즐겨 먹는다. 아파트 상가 일층에 자리한 참참베이커리에서 파는, 초승달을 부풀려 놓는 듯한 빵. 참참마늘크루아상을 베어 물면 진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마늘 향이 마음속까지 퍼진다.
다음 주 수요일이면 한 달 휴가에 마침표를 찍는다. 억지로 하루 세 끼를 찾아 먹고, 그러다 보니 숙면이 가능해졌고, 그 기운으로 삐뚤어지는 마음을 바로 잡으며 요양병원을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이제야 조금 웃는다. 그러다가도 혼자서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꼬락서니가 원통하다는 듯 앙칼지게 굴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자기 몸만 생각한다. 내 병에는 이게 좋다더라, 저게 좋다더라 하며 몸보신 식탐을 부린다. 스스로 걷지 못하고, 몸에 좋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아버지를 보살피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많이 벌어야 하는데…… 독서실에 잠겨 있는 동안 마음의 근육을 키우려고 애썼다. 쉽지 않았으나 살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살려고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데 엊그제 집주인에게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J가 임대한 103동 101호를 사정상 팔아야겠다고, 그러니 계약기간까지만 살아달라고 했다. 그날은 7월 10일이다. 두 달쯤 남았다. 오래오래 살라더니,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적어도 지금 조건으로 이 아파트에서 2년은 더 살 수 있겠거니 했다. 평수를 줄이고, 줄여 여기까지 왔는데 또 어디로 가야할까. 보증금을 더 얹어주거나, 아니면 평수를 더 줄이면 된다. 하지만 둘 다 불가능하다.
최근 J는 전통 깊은 국내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선정된 소설을 읽고 깜짝 놀랐다. 소설가가 J의 처지와 속마음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집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여자의 동선을 따라 갈수록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여자가 J에게 “당신도 분명 이런 수순을 밟게 될 거야” 라고 속삭이는 듯해서 소름이 끼쳤다. 여자의 부모는 오래 전 이혼했고, 그들은 자매를 한 명씩 ‘나눠’ 가졌다. 여자는 아버지의 몫이었다. 가족은 반으로 갈라지면서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됐다. 현재 여자의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파묻혀 산소호흡기의 힘으로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시 외곽으로, 작은 평수로, 산동네로 세간을 옮겼다. 지금은 요양병원 입원비 때문에 반지하로 내려앉았다. 여자는 멍하니 앉아 뇌까린다. 더 물러나야 한다면 이제는 땅속이나 하늘뿐이라고.
사실 J는 앞으로 어디선가 일을 하더라도 이 독서실을 안식처로 삼으려 했다. 짬이 날 때마다 들러 참참마늘크루아상을 먹으면서 뜨개질미녀와 나이든 수험생의 안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조만간 이삿짐을 싸야 한다…… 순간 J의 꽉 막힌 머릿속에 곰 한 마리가 다소곳이 떠올랐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서 마늘 스무 쪽을 먹었다는 곰 여인. J는 골똘히 생각한다. 동굴 같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독서실에서 통마늘진액과, 흑마늘과 참참마늘크루아상을 꾸준히 먹으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펼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