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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Sep 15. 2020

글로써 사람을 다독인다

오해는 사소한 일로부터 비롯된다

글이 가진 무서움을 인지해야 한다.


2019년 어느 날, 예쁘고 노래를 잘한다 생각했던 연예인이 세상을 떠난다.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유산과 관련한 불편한 사후처리에 대해서 지켜본 후,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돈이란 무엇이며, 돈이 가진 속성은 인간의 본질을 애써 외면하는가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죽음의 계기가 된 인터넷 글쓰기에 대해 깊은 명상에 잠긴다.


창작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자유는 존재한다. 문제는 자신이 쓴 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타인이 상처를 받는 일이다.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경험하고 나서 인간에 대해, 사람의 다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어쩌면 사소한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나 나에게는 상당히 민감하면서 거슬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기회에 글이 가진 무서움과 영향력에 대해 나의 의견을 써 본다.


오해는 사소한 일로부터 비롯된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살다 보니까 다양한 경험이 가능할 터. 반갑지는 않겠지만 매번 좋은 일만 일어나기는 어렵다. 오해란 녀석은 누군가의 사소한 말과 행동을 양분 삼아 활개를 치는 본성이 있다. 내가 겪은 황당한 사건의 내용을 요약하면, 인터넷에서 이웃을 맺은 분 가운데 한 분이 어느 날 지인이 데리고 온 야생 고양이를 키우게 되고, 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데 하필이면 나와 이성동명(異姓洞名)이다. 다시 말해 부계의 성(姓)은 다르고, 이름(名)은 같다는 말이다.


사람의 이름과 동물의 이름이 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사람의 의견이다. 그러면서 해당 글을 수정하거나 비공개로 전환해달라는 내 요구를 거절한다. 다만 앞으로 쓰는 글은 <양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를 하겠단다. 여기까지는 좋다. 나도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양보하는 척하면서 내가 요청한 내용이 불편하단다.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단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내 요구가 불편하다는 말에서부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 어쩌면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이므로 모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 상당히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고 어느 정도는 서로에 대해 친분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다면 이런 요청이 무리가 아니라 판단되고, 내가 심히 그 글을 읽고 불쾌하다면 서로가 양보하는 미덕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양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좋으나 기존의 글도 조금만 수정하면 좋으련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연히 생겨난 일이니 사소한 오해로 치부하고 웃어넘길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 고양이는 내 이름으로 불릴 것이고, 그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난 그것까지는 어쩌지 못함을 잘 알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글로 표현되고 이것이 타인에게 공유되어 즐거운 일상의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그 글을 내가 볼 수 있다는 점이 더욱더 어렵게 한다. 물론 지금은 모든 관계를 종료했으니 내가 다시는 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일은 없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늘 한쪽에 의문이 있으면 확인해 보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 그게 내심 두렵다.


휴대폰 그만 봐야지 하면서 계속 보는 심리랄까. 호기심은 다른 관심사보다 우선해서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를 정지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어쩌면 중독과도 같이 취급되는 심리적인 원인과 실제의 행동이 큰 이유가 너무 자주 이용하고, 손에 쉽게 접하기 때문이리라. 이번 일도 반려견과 반려묘 천만인 시대니까 그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넘기면 되는데 내가 직접 이 일의 당사자가 되고 보니 무시할 일이 못 된다. 이토록 시리도록 가슴을 부여잡고 아파하니 현실은 생각보다 가혹하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누군가 길고양이나 들개에게 자신의 이름이나 가족 이름, 심지어 돌아가신 부모님 이름으로 호명한다면 가히 누가 반갑겠는가? 그렇게 되면 타인의 일이 아닌 직접적인 자기 일이 됨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다면 만물에 이해심이 깊은 거로 해석이 되려나?


글로써 사람을 다독인다.


나와 관련한 사람들은 글과 관련한 분들이 많고 앞으로도 그런 분들과 계속 유대관계를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곤란하다.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오래 알고 지내기 위해 서로가 존중해야 할 예의는 지켜야 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말아야 평온한 삶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태풍과도 같은 격랑에 휘말릴 수 있다. 잘못 쓴 글은 고치거나 수정이 가능하지만, 잘못 전달된 글은 사람을 벤다. 누군가의 가슴이 칼에 베이듯 서걱거리는 물리적 고통을 수반하며 사정없이 벤다. 난 이번 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둘 것 같다. 이틀 밤을 꼬박 새워가며 어떻게 글로써 다독여볼까 고민했고, 그에 대한 해법이 바로 글이다. 글로써 사람을 벤다는 무서운 진실도 존재하지만, 이면에는 글로써 다독여 치유되는 일이 많을 테다. 나는 글의 긍정적 힘을 믿는다.


내가 이토록 긴 글을 쓴 이유는 그간 좋았던 관계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그 사람의 본성에 반하여 내가 민감히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인간관계는 사소한 오해로부터 틀어지고, 다져왔던 깊은 신뢰의 대지도 다름의 관점에서 갈라진다. 다름이 틀림과는 다른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람과 동물의 이름이 다를 필요가 없다는 그 사람의 의견과 어느 정도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는 내 의견의 합의점은 과연 어느 종착역에서 어떤 결말을 맞이할까 궁금했는데, 이 글을 완료하고 하루가 지나 상대방이 글을 비공개로 전환함으로써 일단 문제는 종결된 것으로 하고 서로가 작별 인사를 고한다. 힘겨운 한 주였지만 글로 호소함으로써 그 사람이 반응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는다.




Written By The 한결.

2020.09.15 대한민국 대구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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