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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Mar 01. 2021

결핍은 삶에 애착을 불러온다

부족하지만 자유롭고 행복하다

나는 삶에 애착이 큰 사람이다.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막연히 가난이 싫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가난이 무서운 게 아니라 가난해서 생기는 불편함이 싫은 건데, 어린 시절엔 가난 그 자체가 부끄럽고 두려웠다. 정당한 방식이고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왔으니 나는 삶에 애착이 상당히 큰 사람이 맞다. 그래서였을까? 내 삶의 터전이 여러 번 바뀐 계기가 된 것이 인생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고, 그저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히 소망으로 존재한다.


누구도 가난을 원치 않는다. 가난이 건네주는 불편함을 겪어본 사람은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풍요는 삶의 편리함을 대체해준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한다. 고향 집은 전기가 빨리 들어왔지만, 일부 초가에는 전기 공급이 늦었던 적이 있다. 전기가 막 시골 구석구석에 공급되던 시절이 떠오른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며 공공근로로 온 동네가 전기로 밝게 빛나던 날, 대낮처럼 시골길이 환하게 밝혀졌을 때의 놀라움은 문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가난한 이에게는 이 전기조차 마음껏 쓸 경제적 여유가 안 되므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존의 방식을 고수한다. 편리하고 밝은 전깃불 대신 어둡고 침침하며 불편한 호롱불로 과거를 이어간다. 1980년대 시골은 여전히 어둠이 지배적인 공간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저 흐린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어둠은 아이들을 바깥으로 부른다.


시골 초등학교엔 학년 별로 한 반이지만, 한 학년에 30명 내지는 40명 하던 때였으니 그나마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아이가 마을을 시끄럽게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낮 동안 학교에 있던 아이들에게 평일 밤에 나가서 노는 일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주말은 달랐으니. 해가 지고 어둠이 스멀스멀 검은 장막을 걸치고 산 아래로 낮게 드리울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 마을 회관으로 모여 편을 가른다. 밤에만 즐기는 술래잡기를 하기 위함인데 청군과 백군처럼 팀을 나누어 공격과 수비를 주고받는다. 수비는 숨는 일이고, 공격은 숨은 이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중학생 형들과 누나들도 함께 놀았으니 지금 세대는 상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각각의 손에 손전등을 들고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던 것을 생각하노라면 입가의 주름이 절로 씰룩쌜룩한다.


각 팀에는 리더가 존재하는데, 게임의 법칙은 <숨는 장소는 한 군데이고, 그 주변에 모든 팀원이 쥐 죽은 듯 숨죽이고 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 잡히면 최종 승리는 찾은 팀이 가져가며 공수 교대한다. 어둠은 숨는 이에게 가장 믿음직한 아군이며, 보름에 가까운 달은 이들을 찾기에 눈을 밝히며 찾는 이에게 최고의 수색 파트너가 되어준다. 시골은 고즈넉한 풍경 속에 어둠조차도 달빛과 함께 은은하게 추억을 선물한다.


결핍은 삶에 애착을 불러온다.


내가 가지지 못한, 나에겐 없으나 타인에겐 있는 무언가를 갖기 위해 주말의 여유로운 시간을 반납하기도 한다. 집이나 자동차, 사회적 지위나 회사에서의 승진을 위한 몸부림이 이에 해당한다. 과유불급이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인데 내 삶에 무언가 넘친 적이 얼마나 자주 있었나 생각해보면 아직은 부족한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걸 보면 너무 이른 나이에 내 권리를 모두 내려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조금 더 오래 해도, 만약 그때 그렇게 했었더라면, 그냥 지금처럼은 아닐 거라는 막연한 가정도 간혹 피어난다. 과거의 선택이 만족스럽지 못함은 현재의 불행을 대변하는 말이라는데 그건 전혀 아니고. 이래저래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무언가 부족함을 느껴야 더 노력한다는 내 평소의 믿음대로 앞으로의 생활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해야 함을 잊지 않는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 2,000송이가 열려 화제가 된 농부가 있는데, 비결이 간단하단다. 물은 가끔 부족하게 줘서 포도나무 스스로 뿌리가 넓게 번지고 가지와 잎의 수를 많게 해서 광합성 면적을 늘리면 된단다. 듣기에는 간단한데 과연 이걸 따라 하는 이가 몇 될까 싶다. 부족하다는 것, 결핍은 삶에 애착을 불러온다. 어둠 하나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함을 느끼던 시절이 분명 있었음을 기억하는 나에게 약간의 부족함은 그저 앞으로의 노력에 원동력일 뿐이다. 별빛 하나라도 외롭지 않던 밤, 날은 차고 바람은 불지만, 어둠이 가끔은 포근한 이불이 되어 몸을 감싸주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하나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내가 가진 현재의 모든 것에 애정을 가지고 사는 일이 더 기쁘고 즐거운 일임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부족하지만 자유롭고 행복하다.


경남 남해군에서 겨울을 오롯이 마주했고, 곧 석 달을 채운다. 시골에 와서 생긴 습관 중의 하나는 열흘에 한 번 정도는 보일러 기름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난방유가 바닥나고 보일러가 정지하면서 하마터면 냉방에서 잠을 잘 뻔했던 기억으로 인해 만들어진 습관이다. 도시의 아파트는 난방 연료가 도시가스이므로 대략 한 달이면 얼마 정도의 비용이며, 굳이 계량기를 보지 않더라도 매달 정산되어 가스가 공급되고 요금이 청구되지만, 시골은 그렇지 않다. 계획 없이 썼다가는 어느 날 갑자기 난방유가 바닥나 추운 바닥을 마주해야 하며, 난방비는 속수무책으로 돈지갑을 낚아채 간다.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돈이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맑은 공기와 푸른 바다를 마주하며 새날 새 아침을 맞는다. 하루 중 가장 즐겁고 행복 가득한 순간은 아침저녁으로 아내와 함께 바닷가를 걸을 때다. 노을이 지는 바다를 구경하며 하루가 선물한 축복에 감사 기도를 드린다. 부족하지만 자유롭고 행복하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3.01 대한민국 남해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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