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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Feb 24. 2021

구수한 밥 내음이 나를 부른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놀다 보면 하루가 짧다.


낮이 짧은 겨울엔 언 땅 위에서 몸이 분주하기 마련이다. 열 살 전후, 겨울 놀이라고 해봐야 뭐가 있을까 싶지만, 생각해보면 의외로 많다. 납작한 돌로 상대편의 돌을 무너트리는 비석 치기, 얼음 위에서 얼음 썰매 타기, 겨울 들녘에 흩어진 볏짚으로 근사한 집 짓기, 인간 도미노를 연상시키는 말뚝 박기, 어둠을 배경으로 편을 나눠 꼭꼭 숨어서 정해진 시간 내에 찾아내는 술래잡기, 가오리와 방패를 연상시키는 연을 만들어서 날리는 연날리기 등이 있다. 절로 미소가 피어나는 풍경이 여기저기 살아난다. 


특히 겨울은 얼음 위에서 얼음 썰매 타기가 인기가 많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수 제작한 얼음 썰매로 쌩쌩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볼은 붉어진다. 앞뒤로 연신 휘두르는 송곳이 얼음 여기저기를 깊게 파헤칠수록 썰매는 빠른 속도를 낸다. 아침에 곱게 얼었던 빙판은 한낮이 되면 조금씩 녹아 물 반 얼음 반으로 섞이게 된다. 이때부터 제2막은 시작된다. 약속이나 한 듯이 한둘이 서서히 서로를 추격하고 밀고 넘어트리기 시작한다. 이때 넘어진 아이는 신발과 옷이 흠뻑 젖게 된다. 한겨울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니. 이 모습이 웃겨서 여러 아이에게 반복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편 가르기가 되어 반은 물에 빠지고 반은 넘어지고 결국 모두가 신발과 옷이 젖게 된다. 서로 젖은 모양을 보고 한바탕 웃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간다.


구수한 밥 내음이 나를 부른다.


온종일 얼음에 지친 시골 아이가 집에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반겼던 것은 고소한 밥 내음이다. 갓 지은 하얀 쌀밥은 김치 하나로도 밥 한 공기 뚝딱 비워낼 만큼 맛의 유혹이 강하다. 반찬 투정을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밥을 비워냈으니. 냄새 또는 향기로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 감정을 생각해내는 일, 프랑스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푸르스트 현상이 있다. 미국의 레이첼 헤르츠 박사가 입증했다고 한다. 애석하게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소설이고, 곧 읽을 거라는 막연한 계획만 있다. 어찌 되었든 밥 내음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일은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포근한 기억으로 자리한다.


어쩌다 부모님께서 집을 비우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이웃에게 부탁하거나 친척에게 부탁해서 자식의 끼니를 부탁하곤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반찬거리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즐겨 먹는 메뉴 하나 정도는 꼭 전달하시고 볼일을 보러 가시던 부모님의 마음과는 달리, 늘 먹던 것이라 일부러 다른 반찬을 먹으려고 기를 쓰던 내 모습에 문득 부끄러움이 번진다. 어리다는 것은 타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그릇이 못 된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어른의 보살핌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들의 훈육에 차별이 없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육아에 관심을 가진, 육아를 경험한, 육아와 관련한 모든 이들은 이 말에 공감한다. 내가 나고 자란 시골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말은 무조건 옳다. 농업으로 삶을 이어가는 시골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들의 훈육에는 차별이 없다. 내 자식이 귀하면 이웃의 자식도 귀한 법이고, 이웃과는 정으로 뭉쳐져 사촌 이상의 유대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가히 온 마을이 여러 아이를 두루두루 키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웃이 나서서 아이들의 끼니를 챙겨주던 모습은 요즘 들어 애타게 그리운 모습이다. 단순한 밥 한 끼가 아니라 가난한 풍경 속에 스며든 아름다운 풍습이라는 사실과 함께.


시골에서는 촌수라는 개념이 강하다. 가깝게는 사촌에서부터 멀게는 6촌 이상의 친척까지도 집안 어르신에겐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 자칫 깜박하고 인사라도 놓칠라치면 버릇없는 아이로 오해받기 쉽다. 단순히 당사자의 문제가 아닌 부모의 자녀 교육과도 직결된다. 내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억으로 촌수 때문에 빚어진 낯선 경험이 있다. 나보다 나이는 몇 곱절이나 높은 어른인데 촌수를 따져 호형호제해야 하는 관계가 있는데, 특히 형님으로 불리던 분의 아내가 나를 부를 때 도련님, 도련님 하던 일이 어찌 그리 쑥스럽던지. 그 집의 아들과 딸은 그 모습이 마냥 우스운지 부끄러워 도망치던 모습을 보며 한참이나 웃고 그랬었는데. 게다가 그렇게 웃던 아이들이 자신들의 부모가 보는 앞에서는 나에게 깍듯하게 어른 대접을 하던 일은 또 얼마나 부자연스럽던지. 지금은 그저 좋았던 풍습이 있었다는 기억으로 행복하기만 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빈자리가 늘어감을 수용하는 일이다. 누군가 곁에 머물다 나를 스쳐 간 자리, 분명히 자리하여 기억에 오래도록 살아 숨 쉬며 즐거움을 안겨주던 모든 관계의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다. 빈자리가 드러나고 지워진 흔적이 늘어나면서 채우지 못한 날들로 인해 아파하는 시간을 가슴으로 보듬어 안는 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빈 자리의 존재가 서글퍼짐을 마지 못해 수긍하는 일이기도 하다.


찬 바람이 불어 바깥 외출도 어려운 요즘, 더군다나 온 세상이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마음 편히 숨쉬기도 버겁다. 내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 삶의 터전을 경남 남해군으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려면 읍내로 나가야 한다. 남해군도 관광지로 이름난 지역이라 많은 사람이 관광과 휴양을 목적으로 찾는다. 아이 하나 또는 둘, 많으면 셋까지 거느린 가족을 보면 비록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아이는 아니지만 반갑다. 조용해서 좋은데, 너무 조용하면 고요와 적막이 안개처럼 마을을 감싸 그나마 가진 생기마저 앗아간다. 소란스럽게 떠들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생의 활기를 느끼고 싶은데, 시골은 이미 아이들의 목소리가 장독대 뒤로 숨은 지 오래다. 아이가 없는 시골은 미래의 꿈조차 잡초뿐인 휴경지처럼 공허하기만 하다. 텅 빈 시골에는 공허한 하늘과 바람만 휘날린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판 여기저기에 무심한 봄나물이 지천이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2.24 대한민국 남해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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