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지나온 삶이 내 글의 원천이다
글을 통해 삶을 회상한다.
디지털이 전해준 편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이 있다.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게 하는 종이의 질감을 서서히 잊어간다는 것인데 장단점이 있을 테다.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종이의 질감을 즐긴다. 사락사락 넘길 때 들리는 페이지의 속삭이는 듯한 작은 소리의 유혹은 견디기 어렵다. 잠 못 드는 밤 곁에 두고 읽는 책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들리는 사락사락하는 일정한 리듬에 안정감을 느껴 쉽게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는 수많은 책을 휴대전화가 아닌 책을 통해서 직접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읽었고, 읽고 있고, 앞으로 읽어나갈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막상 책상에 앉지만 한 줄도 못 쓰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하루를 빈 공백처럼 남기고 잠드는 날은 마음이 편치 않다. 숙제 안 하고 잠드는 아이의 불안한 마음이다. 당장 내일 누군가로부터 질책을 당할 텐데 하는 불안감은 없지만, 내면의 감시자로부터 전해오는 압박감은 심리적으로 많은 면에서 압박이 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일을 새로 시작하기 어렵듯이 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살아가는 이 삶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문장으로 남겨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편리함을 좇아 하루씩 미루면 어느새 글쓰기와 멀어진다.
잠들기 전 가장 활발하게 생동감이 느껴지는 현상을 자주 경험한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겠다는 열정을 품고 설레는 밤을 보내지만, 막상 아침이 되면 모든 의욕이 날개를 달고 저 멀리 달아나는 경우를 느낀 적이 많다. 생각이 생각으로 그치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발생시키기엔 조금 미약한 감이 있다. 글쓰기는 안개 같은 생각을 선명한 계획으로 옮기는 일이다. 글을 통해 내가 살아온 삶을 회상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작은 실천은 쌓이면 크나큰 재산이 된다. 글을 통해 삶을 회상한다면 적어도 후회는 최소한으로 남을 것이라 믿는다.
고향과 지나온 삶이 내 글의 원천이다.
2020년 5월에 시작된, 내 고향과 내 어린 시절 가슴 시린 장면들에 대한 글은 오늘로 마무리한다. 글을 쓰면서 마주하게 된 부모님과 고향의 정겨웠던 풍경들, 그 안에 녹아있는 내 어린 시절의 따스한 추억 모두가 지금도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다.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이 아련한 마음은 그리움보다 조금 짙은 애절함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다가가지 못하는 어떤 장면들 앞에서 한없는 아쉬움에 한숨짓는 일도 허다하니까. 손 내밀면 닿을 듯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과 장면들은 기어코 가슴을 지나 코끝을 스치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하늘이 내린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끈끈하다.
어릴 때는 피하고만 싶었던 장면들이 나이가 들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을 때 느껴지던 당혹감은 단순히 내가 나이만 들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전자의 영향으로 부모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감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듯이 행동 하나도 가끔은 유사한 양상을 띠기도 한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해 즐겨 부르시던 아버지의 애창곡을 내가 따라서 흥얼거린다든지, 흥이 나실 때마다 웃으시며 어깨를 들썩거리시던 어머니의 행동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을 때 느껴지던 그리움과 애절함, 우리는 결국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어제와 오늘을 잇고 내일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님은 나의 과거가 되고, 나는 나의 현재가 되며, 후세의 누군가는 나의 미래가 되어 지난날을 회상할 테다. 그때 내가 쓴 글이 내 삶을 회상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마음이 가는 곳이 고향이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 더욱 멀어진 고향인데, 살아가면서 더 애절한 모습으로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아 가끔은 잠 못 들고 뒤척인다. 그 덕분인지 농촌과 어촌의 모습을 모두 갖춘 남해라는 곳이 내 마음을 끌었나 보다. 농사를 짓는 어촌 마을, 관광지이면서 쉼의 공간이 되어주는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일 년을 살겠다고 내려왔는데, 살아갈 최소한의 경비를 마련할 일자리를 찾지 못해 애가 타는 것을 제외하고는 만족한다. 많지 않지만, 동원 가능한 경제력으로 안간힘을 쓰며 버텨가는 중이다. 게다가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유통업을 겸하고 있으니 조금씩 여유가 생길 것이라 믿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면 무료했을 텐데,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실패든 성공이든 그 끝을 향해 뛰어봐야 후회하지 않을 테다. 남해가 제2의 고향이 되어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남해 살면서 삶에 변화가 생겼다. 어른이 된다면 농사만은 짓지 않겠다고 했던 내 다짐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변했으니 이 변화가 가끔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2020년 12월 겨울에 남해로 와서 지금까지 가장 즐겨 했던 것이 다름 아닌 텃밭 농사다. 아침이면 씨앗이 싹을 틔웠는지 궁금해서 날이 밝기가 무섭게 텃밭으로 발길을 향하던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 싱싱한 먹거리를 안겨다 주었을 때의 기쁨이란 직접 작물을 재배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참된 수확의 기분이리라. 중복이 지난 2021년 7월 25일 현재, 내 머리통보다 더 큰 수박을 수확했는데 그 달콤함과 시원함에 더위가 저 멀리 달아난다. 여기에 큼직한 참외까지 다섯 개 남짓 달렸고, 토마토와 가지는 매일 주렁주렁 익으니 이만하면 풍년이다.
글을 통해 내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많은 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날들이 펼쳐놓은 무대에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서 살아갈 테다. 중심을 제대로 잡고 흔들림을 최소화하면서 웃고, 울고를 반복하면서. 글이 내 삶을 관통해서 몸살이 난 적도 있고, 내가 다녀간 모든 곳이 문장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앞으로 펼쳐질, 설렘으로 다가올 삶의 모든 순간이 글과 함께하기에 두렵지 않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7.25 대한민국 남해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