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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Jun 04. 2021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무지개는 태어난다

가끔은 일탈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소가 가족의 일원이 되다.


처음으로 우리 소가 생기던 날, 집안은 온통 잔치 분위기로 생기가 넘친다. 아버지는 연신 소주잔을 들이키며 흐뭇한 표정으로 소 외양간을 바라보고 계시고, 어머니는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시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부정을 막으시려고 맑은 쌀뜨물로 마른 목을 축이게 하셨는데 효과가 있었던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한 번이라도 소가 아프거나 다친 적이 없다. 나는 큰 눈을 지긋이 뜨고 감는 소를 바라보면서 조용한 집에 온순한 소가 들어왔음에 감사한 마음이다. 고된 노동에도 싫다고 거부하지 않는 성품은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소를 부렸던 아버지의 노련함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소는 끼니때마다 사람보다 먼저 대접받는 경우가 빈번하다. 식구들이 식사하기 전에 쇠죽을 끓이는 가마솥이 먼저 끓었으며 쇠죽을 소에게 주고 잘 먹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식사했으니. 쇠죽을 끓일 때 나던 김 내음이 여전히 뇌리에 새겨져 있다. 볏짚을 작고 일정하게 잘라 가마솥에 넣고 물을 길어와 채운 후 쌀 등겨를 듬뿍 뿌려주고 본격적으로 불을 지핀다. 쌀 등겨는 쌀겨가 아주 곱게 분쇄된 고운 입자로 특유의 향긋한 향이 난다. 게다가 콩 껍질과 콩잎을 같이 넣으면 고소한 냄새도 덤이다. 김이 오름과 동시에 이리저리 뒤적이며 조금 더 끓여내면 마침내 근사한 쇠죽이 완성된다.


농촌에서 농사를 주 업으로 하는 가구 중에 소는 중요도 면에서 으뜸이다. 지금은 경운기의 도움으로 소를 이용하여 쟁기를 끄는 일이 드물다. 논과 밭을 갈고 물길을 다듬으며 온갖 궂은일을 다 하던 소가 일선에서 물러난 건 본격적으로 기계화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소가 한몫을 하는 곳이 있으니 고향 마을의 다랑논이 대표적인 예다. 다랑논은 기계가 쉽게 접근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휴지기를 갖지 않는 바에는 소와 함께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한다. 사람이 지나가는 좁고 언덕진 길이면 소가 큰 덩치를 이끌고 느릿하게 접근이 가능하지만, 일정한 도로 폭이 필요한 경운기는 진입이 어렵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농사에 매달린다는 것에 소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은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손이 부족한 농촌의 현실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소는 장정 여러 명의 몫은 충분히 하고도 남는 존재였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가끔은 일탈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농번기가 지나면 아침 일찍 한적한 산으로 가서 소를 풀어놓는다. 집마다 한두 마리의 소를 한 장소에 풀어두면 무리를 지어서 여기저기 떠돌며 풀을 뜯어 먹으며 저녁때 주인이 오기를 기다린다. 농한기에 소를 산에다 풀어두는 것은 지친 삶에 매번 끼니를 챙기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자유롭게 노닐며 신선한 풀을 뜯어 먹어야 소도 건강함을 잘 아는 농촌 사람들의 지혜로운 처사의 한 면이기도 하다. 소는 사람과 성품이 비슷하여 비슷한 성격의 소들이 한 무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얌전한 소들과 난폭한 소들이 각각의 무리를 이루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가끔 이 두 무리가 섞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난폭한 소가 온순한 소 무리에 끼어들면 온순한 소들은 자신의 위치를 잠시 잊고 다른 곳으로 정처 없이 이동한다. 난폭한 소들을 피해 자리를 옮긴다는 것이 처음 놓였던 산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소를 잃어버리는 집이 생긴다. 하마터면 우리 소도 잃어버릴 뻔한 아찔한 경험이 있다.


처음 놓아주었던 장소를 벗어난 소를 찾아 산을 헤집고 다니기를 몇 시간 동안 했는지 모를 정도다. 여름 한낮의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부터 찾았지만, 밤이 깊어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형님 두 분과 나, 삼 형제는 소를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기억, 밤새도록 소가 무사하기를 빌고 또 빌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이튿날 온 가족이 나서서 아침부터 소를 찾아 나섰고, 우리 집을 포함한 다른 집의 소 주인들도 함께 온 산을 뒤진 결과 결국 발견된 소 무리. 꼬박 이틀 헤맨 결과였고 무사태평하게 다른 면 소재지의 산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반갑고 한편으로는 원망스럽던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무지개는 태어난다.


점심 무렵이 지나 두시나 세 시쯤 소를 찾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마침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는 것과 동시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왔고, 잠시 뒤 세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온 천지를 울리는 천둥 번개가 지축을 흔든다. 산속이라 피할 겨를도 없이 옷이 흠뻑 젖고 말았는데 춥고 으스스해질 무렵 서서히 빛 내림이 시작되더니 해가 나오기 시작한다. 신기한 일은 그때부터 생겨나는데 자연이 빚어내는 예술 작품으로 무지개가 고개를 내민다. 비는 여전히 뿌려지고 있는데 그 와중에 해가 떠 있으니 이 불균형의 결과물이 무지개다. 여름날 내리는 소나기는 맑은 날에 갑자기 쏟아지며 검은 구름 아래로 햇볕이 드러날 때 여지없이 무지개가 태어난다.


비와 햇볕은 동 시간대에 존재하는 일이 드물다. 소나기는 예외인지라 한낮의 불청객이기도 하면서 가끔은 청량함을 제공하는 음료처럼 우리 삶에 목마른 가슴을 적신다. 소를 찾으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산을 돌아다닌 우리 목을 적셔준 고마운 음료 같은 존재가 소나기다. 목이 시원하게 적셔졌으니 이젠 눈이 즐거워야 할 차례이기에 무지개가 생겨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비와 햇볕이 공존하면서 만들어진 무지개는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태어난다. 비가 내리는 흐린 날에는 무지개를 볼 수 없다. 온종일 내리는 비로 햇살이 들이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 한낮, 잠시 소나기가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소란을 피우면 이를 잠재우고자 뜨거운 햇살로 소나기를 물리는 과정에서 무지개는 태어난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냥 뜨거운 현실에 갈증을 느끼다가도 가끔은 소나기 같은 사람을 만나 즐거움을 얻는다. 이 즐거움 뒤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무지개가 던져준 행복이 없는지 다시 한번 눈 씻고 찾아봐도 될 것 같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6.04 대한민국 남해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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