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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Apr 17. 2021

시선과 여백 사이에 쉼이 있다

우린 누군가의 여백이다

시선과 여백 사이에 쉼이 있다.


그럴 때가 있다. 시선은 글자를 향하고 있으나 마음은 여백 어딘가에 머무는 순간,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 단락과 단락 사이 그 너머 어딘가의 여백에 놓인 정적에 휘둘리는 순간이 있다. 글자 주위를 겉도는 순간. 휴식이 필요함을 무의식은 스스로 깨우친다. 비워야 채워지는 법인데, 생의 에너지를 미리 당겨 써 정도를 넘어선 피로감에 마냥 허탈하게 한 곳을 응시하며 멍하니 서 있어도 본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마련한 공간이든 아니든, 한 번쯤은 여백에 빠져 빈 곳을 내 생각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다. 여백은 지친 어깨를 내리고 잠시 쉬어가는 공간이다. 눈에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는 일이라 때로는 시선 그 너머에 생각을 놓아두고 잠시 멈춤을 선택하라는 누군가의 배려이기도 하다. 빼곡히 글자로 가득한 공간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놓인 여백이 낫다. 글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미묘한 감정의 골이 여백을 채우는 경우도 많을 테니까. 사람의 시선에 수많은 감정을 담듯 여백은 단어들이 던진 메시지로 그 나머지를 대신한다. 글을 잘 쓰는 이는 적재적소에 독자를 쉬어가게 한다. 너무 앞질러 문맥에서 벗어남을 경계하며 잘 따라오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중간중간 사유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짧은 글에 시선이 모인다.


긴 문장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은데, 강렬한 문구는 오히려 짧은 글에서 돋보인다. 짧은 문장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아 잠시나마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대표적인 예는 광고 카피라이터들이 써내는 문장이다. 정해진 광고 시간은 15초 내외다. 물론 이보다 더 긴 광고도 있지만, 대부분 15초 또는 이보다 짧다. 이 짧은 시간에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하는데, 긴 문장으론 어림없다. 한 화면에 한 단어 또는 한 문장으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건네야 한다. 그리하여 원하는 대로 누군가의 마음을 녹여야 한다. 길을 걷다 발견한 <구겨진 마음마저 다린다>는 세탁소 주인장의 재치 있는 문구가 미소를 지어내게 하는 것처럼.


단순한 문자의 나열도 때로는 가슴을 후벼 파는 순간이 있다. 운명이 잔인한 미소로 넌지시 내려다보며 삶을 정통으로 흔드는 순간이 있다. 굵직한 사건일수록 시간은 길고 느리게 지나가는 법이다. 이럴 때 건네는 선물 같은 말은 짧은 누군가의 위로다. 힘내라고, 기운 내라는 다그침이 아니라 괜찮아, 조금 쉬어도 돼, 넘어진 김에 조금 쉬어서 가라는 격려의 말. 어깨를 다독이면서 말없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충분히 상대방의 마음을 녹인다. 따스한 밥 한 공기 건네는 식당 주인장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도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아름다운 축복이다.


인생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겨울 한 시기를 남해에서 지내며 보아온 풍경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될 것이다. 푸르름이 지워진 공간에 하얀 바탕만 남아 황토 빛깔의 텅 빈 여백만 덩그러니 남았던 들판이 떠오른다. 그 여백에 푸르름을 선물한 보물이 있으니 해풍 맞은 시금치가 그 주인공이다. 하얀 종이에 글자가 새겨진 듯 줄줄이 피어난 시금치를 보니 온통 휑한 산골 내 고향 모습과 대조되면서 어찌나 반갑던지. 눈이 귀한 남해에서 눈을 마주하는 일은 몇 해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값진 경험이다. 2020년 12월에서 2021년 3월까지 남해가 보여준 모습은 눈, 비, 바람, 한파 등 다양하다. 최근 몇 해 만에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는 남해 현지인의 말에 우리가 겪은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값으로 매기기 어렵다.


삶의 형태를 바꾸는 일은 큰 결심이 필요하다. 지속해서 해오던 일을 일순간 접고 다른 일을 찾아 삶의 여백 여기저기를 들추는 일은 시간과 오랜 씨름이 된다. 내가 경험한, 경험하지 않은 모든 경우의 수를 두고 남은 생에 대해 성찰을 하는 시기는 기존의 삶을 잠시 쉬고 있는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익숙하지만 오래가기 어렵다 판단되면 과감히 새로운 방향으로 걸어보는 것도 좋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없진 않지만, 여유로운 일상을 만끽하는 것으로 이 모든 단점을 극복한다. 지난 5년간 그런 길을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걸어갈 테다.


우린 누군가의 여백이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1순위는 사람 사이에서 오는 관계의 어려움이다. 어디를 가나 관계의 끈은 매여있게 마련이고, 사람과 엮이지 않고는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모 방송사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산과 깊은 계곡, 무인도 등에서 홀로 살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떻게든 사람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하다. 어떻게 해서든 덜 피곤한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일밖에 없다. 사람은 저마다 다양한 개성이 있어 이게 정답이라고 해도 나에겐 맞지만, 타인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때로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 자세도 필요하다.


작가가 독자의 사유를 위해 일정한 공간을 여백으로 남기듯이 사람 사이에도 이런 배려는 필요하다. 긴말로 서툰 격려를 건네기보다 조용히 어깨 한쪽을 빌려주는 일은 타인의 삶에 큰 위로가 된다. 사람은 사회적 성격이 강하므로 무리 짓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가 드러난다. 당연히 무리에서 상처받고, 상처 주기를 되풀이한다. 완벽하지 않은 인생이기에 그렇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내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하듯 우린 누군가의 여백으로 남아 서로의 삶을 위로하는 존재로 남아야 한다. 그래야 여백이 주는 쉼으로 인생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4.17 대한민국 남해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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