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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인류학자 Mar 04. 2020

반성보다 용서가 힘이 있다

"괜찮아 그럴수도 있지"

나 어렸을 때 롤러스케이트장 이른바 '롤러장'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6학년 때 친구들과 롤러장에 놀러 갔을 때 본 친구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특별한 장면은 아니었다. 단지 롤러스케이트를 타다가 그 친구가 넘어졌는데, 찡그리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일어서는 모습이 나에게 충격이었다. '어? 넘어졌는데 웃네? 누군가 밀어서, 어디에 걸려서, 아니면 어쩌다 보니 넘어졌어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지 웃을 일이 아닌데, 아니 이 친구는 넘어졌는데 웃고 일어서다니!'  그 당시 나는 넘어진 것은 웃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친구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충격이었던 게 아니었다. 찡그리지 않고 웃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넘어지는 게 화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친구 이름도 이제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때 환하게 웃던 그 친구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경험을 통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의 습성이 쉽게, 완전하게 고쳐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전히 일상에서 넘어지는 일이 생겼을 때 웃어지지 않는다. "관성의 법칙: 물체는 외부로부터 어떤 힘을 받지 않는다면 움직이는 방향이나 속력에 변화가 없다." 이 힘의 법칙은 물리적 세계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세계에도 작용하는 듯하다.

나는 잘 웃는 얼굴이라 사람들은 나를 밝고 긍정적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며 자책하고 괴로워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바로 세워 문제를 해결하거나 더 이상 그 문제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괴로운 감정에 빠져 차라리 '반성'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때가 많다.

겁이 많고 운동발달이 또래보다 더딘 큰 아이를 운동시키겠다는 계획으로 키즈카페에 데려간 적이 있다. 좋아하는 역할놀이 장난감이 많은 키즈카페를 가겠다는 아이 의견을 누르고 도전적인 신체활동을 많이 할 수 있는 키즈카페로 데려갔다. 그런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자유롭게 노는 모습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이런 키즈카페에 왔음에도 역시 주방놀이만 하는 큰 아이를 설득해서 징검다리로 데려갔다. 분명히 지난번에 했었던 건데 아이는 겁을 내며 무섭다고 울먹인다. 몇 번 용기를 북돋아주다가 이내 나는 " 이 겁쟁이! 이제 키즈카페 오지 말자"라는 말로 내 감정을 분출시켰다. 이 말이 얼마나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지, 이 말을 한다면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엄마인지 알면서도 뱉어버렸다. 아니 알기 때문인지 그 말이 터져 나왔다. 내 안에 내가 아닌 것 같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이 또 나왔다. 이건 어디서 오는 건가. 아이를 기르고 나서는 종종 마주한다. 우리 엄마가 나를 어떻게 길렀는지 기억도 흐릿한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내가 잘못했으면서 괜히 엄마 탓을 하고 싶은 심보다.

해온이는 나의 눈치 살피며 나를 피해 달아났다. 그 순간에도 그 모습이 적잖이 충격적이었지만, 그다음 날까지도 그 모습이 순간순간 떠올랐다. 해온이는 이미 그 사건으로부터 빠져나와 일상을 살고 있는데 내 속 사람은 아직도 "반성중"이다. 차를 운전하는 길에 다시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는 그만 울어버렸다. "하나님, 제발 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잘못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복기하듯 재현하고, 내가 대체 왜 그런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지쳤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반성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젠 반성도 할 수 없다. 결국 그냥 속절없이 울어버렸다.

이내 집에 도착해서 아이들을 만났다. "해온아~" 하며 큰 아이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신나게 놀아주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반성을 하고 있을 때는 달라지지 않더니 말이다. 반성을 멈추고 그냥 울고 났는데 절로 그렇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반성"하고 있던 나 때문에 해온이는 그 일이 당하고 나서도 며칠 더 우울한 기분의 엄마와 마주해야만 했다. 그놈의 반성의 시간을 빨리 멈출 것을... 나를 빨리 용서해 줄 것을...

반성에는 힘이 없다. 반성의 생각은 나를 더 깊고 어두운 감정의 동굴로 빠져들게 한다. 하지만 용서에는 힘이 있다. 특히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그렇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잘못을 저지른 나도, 실수한 나도 인정받고 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반성은 생각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용서는 생각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날 차에서 반성하는 생각을 멈추고 그냥 울며 감정을 쏟아냈을 때,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일어난 건 아닐까? 용서는 거창한 "괜찮아"가 아니라, "그래. 나는 그랬어"/ "그래. 너는 그랬어"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존재를 인정하기
" I am Who I am."
"You are Who you are."


2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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