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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인류학자 Apr 23. 2020

딸이 못마땅하다.

밥상머리 수련기


딸이 못마땅하다.

이제 다섯 살 된 딸아이에게서 느낀 이 감정에 생소하고, 겁이 난다.  

소리 내어 웃는 모습만으로 경탄하고,

동그라미에 점 두 개 찍어 엄마 얼굴이라는 모습에 박수를 치며 기뻐했었던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아이에게 못마땅하다는 감정을 느끼다니, 지금은 생소한 이 감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어느새 일상이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그 감정의 발단은 밥상이다.

그렇다 또 밥상이다.

차려진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들지 않은 채 한 동안 앉아 있다.


밥상감옥 by엄마인류학


'에휴, 또 저런다'

나는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고 말한다.



"해온아~ 어서 밥 먹기 시작하자. 숟가락 들고~"


그래도 별 반응이 없다. 갓된 밥상과 새로운 반찬 앞에서 숟가락이 들어지지 않는다니, 진짜 식욕이 없나보다.


그런데 그런 날이 너무 잦다.  


"해온아 숟가락을 들고 있어! 그래야 네가 밥 먹는 중이라는 걸 안 잊지~"

밥을 먹다가 계속 딴짓을 하는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나도 처음 들어 보고 하는 말.

이게 맞는 말인지 모르면서 하는 말이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을 갖은 아이니, 잘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새 압박감이 되었다. 그 압박감에 1년 정도는 숟가락을 들고 ''를 다하며 쫓아다녔다.



아이는 조금 더 자랐고 더이상 나는 호비나 핑크퐁이 등장하는 쑈는 하지 않는다. 대신 종용과 협박을 시작했다.

"이거 다 먹으면 딸기 줄게"

"스스로 다 먹으면 도장 찍자. 도장 다 모으면 매니큐어 박스 사자~"

"다 안 먹으면 간식 없어!"



그리고 아이는 조금 더 자랐다. 만으로 다섯 살을 조금 앞둔 지금, 그 아이를 보고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휴...'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감정을 발견했다. 이 감정은 중학생 딸아이가 핸드폰을 몇 시간 째하고 있거나, 이상한 옷을 입고 돌아다닐 때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던가. 그런데 내가 이 감정을 다섯 살 아이에게 느낀다는 게,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진다. 벌써...





이건 아니다.  해온이가 중학생이 되어도, 혹여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다고 해도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일이 없었으면 했는데 말이다.


밥 먹이는 문제로 사투를 벌이면서 나중에 아이의 학업문제에서도 내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반문하게 된다. 한 참 공부를 해야 한다는 시기에 공부에 관심도 의욕도 없는 아이를 보며 내가 과연 지금 같은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또 밥상에서 '엄마되기 수련'을 시작한다.


나는 체력과 근육을 쌓는다.  (해온이는 맷집을 쌓고 있으려나)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한 수련 말이다. 사춘기 딸아이의 욕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힘이 어찌 밥상머리에서 숟가락 들지 않는 아이에게 밥을 먹여 보지 않고 길러질 수 있겠는가..


'밥을 먹어야 키가 크지'

 이런 말은 절대 하지 말자. 밥을 먹이려는 게 아니라, '너는 키가 작다. 키가 작은 건 안 좋은 거다. 그러므로 너는 안 좋은 거다'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꼴이다. 아이가 작은 게 안타깝다면 그냥 한 수저 더 떠먹이자. 괜히 나의 조급함과 불안함에 협박하지 말자.  


해온이 기분을 상상해 본다.

'엄마 아빠는  밥 먹을 때마다 성화다. 다른 아이들은 밥 먹다가 먹기 싫다면 엄마가 '그래 그만 먹어' 그러던데, 나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밥 먹기 싫은 때는 안 먹고 싶기도 한데, 여태 한 끼를 건너뛰어 본 적이 없다. 아 피곤하다.'


작은 키 때문에 불편 일보다는 작은 키 때문에 겪는 상황과 시선이 힘든 건데, 바로 엄마 아빠가 생애 처음으로 그 상황과 시선을 아이에게 겪게 하는 꼴이다.


해온이 만큼 작은 아이가 있다. 해온이 어린이집 친구이기도 하고 그 아이 엄마가 나의 친구이기도 해서 종종 함께 만난다. 해온이가 소원을 말하는 상황에서 '키 크게 해 주세요'라고 했던 일을 그 아이 엄마에게 말했다. 해온이가 작은 키를 콤플렉스로 느끼고 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작은 키여도 그런 자신을 싫어하지 않고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자고 나와 남편이 애써왔는데, 그 소원을 비는 아이를 보니 마치 '나는 키 작은 내가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같은 키의 그 아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키 큰 친구가 놀어와서 이름을 "황예나"하고 불렀는데 전혀 기죽는 기색 없이 "황자 빼!"라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밥 먹이는 일로 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했던 그 조바심을 아이에게 심어주고 있지 않은가 되돌아보았다.


해온아 너란 존재가 어느 순간에도 못마땅하게 여겨지지 않도록 엄마가 노력할게. 너는 존재만으로도 경탄 그 자체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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