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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인류학자 Jan 04. 2021

생각이 나를 괴롭힐 때

소리의 정체를 알고 흘려보내기  

2001년 개봉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  

실존하는 천재 수학자 이야기로만 기억한 이 영화를 누군가의 인생영화라는 추천을 받고 다시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인생영화가 되었다.


주인공 존 내쉬는 천재 수학자다. 이야기 중반에 식스센스급 반전이 등장한다. 존 내쉬에게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제안한 정부 비밀요원은 존재하지 않다며 그는 정신병동에 갇힌다. (영화가 잘 만들어진 것이, 비밀요원이 진짜고 정신병동에 가 둔 정신과 의사가 존 내쉬를 억울하게 가두려는 적은 아닌지 가늠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참 볼만하다.) 존 내쉬는 정신과 약을 먹은 뒤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수 없다. 아주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 종이에 수학문제를 풀어보지만, 예전처럼 되지 않는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내가 잠자리에 불만을 갖자 혹시 약 때문인가 하는 마음에 약을 중단한다. 

그러자 다시 비밀요원이 찾아온다. 비밀요원이 환영인지 실재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다시 암호 해독에 매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세월이 지나도 자라지 않는 룸메이트 조카의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그것이 환영임을 인지한다. 그때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존 내쉬는 환영이 보이는 채로 살아간다.  더 이상 약을 먹지 않는다. 약은 환영이 보이지 않게 해 주지만, 동시에 일과 관계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 평생 그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보지 않고,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만 듣지 않는다. 그냥 흘려보낸다. 대신 들어야 할 소리, 해야 할 것에 집중하며 자신의 길을 간다. 그리고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다. 



우리에게 들리는 수많은 소리가 있다. 

친구, 가족, 직장동료. 

가까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온 여러 소리가 우리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정작 가장 나를 괴롭히는 소리는 내 내면의 소리이다. 

그 소리는 비로소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서 시작되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지리하게 나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잘할 수 있을까?' 

나 스스로를 후회하고, 돌이켜보고, 다그치고, 걱정하고, 의심하는 소리들.

'이게 다 그 사람 때문이야'

'어쩜 그럴 수 있지' 

미워하고 원망하는 소리들. 


"무시해" "신경 쓰지 마" 하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조언을.

 이 영화에서 새롭고 강렬하게 그려낸다.


들리는 데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흘려보내라.



영화에서 두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우선은, 흘려보내야 할 소리의 정체를 아는 것이다.


 존 내쉬는 그들이 환영임을 알고 난 뒤부터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만 부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변화는 환영임을 인지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했다. 그들이 쫓아오면 도망치기도 하고, 지팡이를 휘두르기도 하며 저항한다. 존 내쉬가 노인이 되어 수상을 하는 마지막 장면에도 그 세 명의 환영은 등장한다. 그리고 존 내쉬에게 말은 건다. 그들은 여전히 환영 속에 존재하지만 한결 온순해졌고, 존 내쉬는 그들은 마치 친구로 여기는 듯 차분히 대했다.

 

우리에게 들리는 마음속의 수많은 소리와 생각의 정체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있다. 

이 생각이 나를 살리는 생각인지, 나를 죽이는 생각인지. 

나에게 들리는 모든 소리, 모든 생각을 내 것으로 안고 있지 말고, 휘둘리지 말자.

그 소리가 나를 죽이는 소리라면, 존 내쉬가 그랬던 것처럼  거부하고 저항하자. 


"그 생각, 저리 가!!"





그다음으로, 내가 들어야 할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 소리가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 소리라고 인식했다면 그다음은 내가 들어야 할 소리, 곧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나를 죽이는 소리에 저항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존 내쉬는 교수라는 직업도, 그간 쌓아 온 명예도 정신병으로 모두 잃었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존 내쉬는 단지 환영이 하는 소리만을 흘려보낸 게 아니다. 자신을 초라하고, 주저하고, 무력하게 하려는 내면의 수많은 소리들을 흘려보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살리는 소리에 집중했기에 그간 쌓아온 업적과 체면을 뒤로하고, 연구실도 아닌 자신이 근무했던 대학교 도서관 한편에서 자신의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지금 내가 흘려보내야 할 소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집중해야 할 소리는 무엇인가. 


19년 전 봤던 영화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처럼 

이 영화가 새로운 삶의 맥락에서 다시금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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