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로맨틱코미디 장르를 기피하게 되었다. 천편일률적인 캐릭터 설정과 예상으로부터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전개, 뭣보다 예외 없이 드러나는 전근대적인 여성상이 나를 지루하거나 불편하게 했기 때문.
그러나 이 영화, <롱 샷>은 다르다.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었던 이들이라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여기엔 평범하고 순진무구한 여주인공도 백마 탄 왕자님도 없다. 대신, 유능한 국무장관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인 여주인공 '샬롯'과 조금 모자라보이는, 멋있다고 하기엔 어딘지 부족한 실직 기자 남주인공 '플라스키'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나이 조차 여주인공이 더 많다.
물론, '예상 가능한 전개' 항목에 있어서 만큼은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움을 부정하진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롱 샷>은 기존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와 구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새롭고, 의미 있으며, 박수받아 마땅하다.그야말로 '가장 트렌디한 로코'이다.
누나이자 직장 상사. 나이, 권력 모든 면에 있어서 여주인공 샬롯은 남주인공 플라스키보다 우위에 있다.
13살 때의 첫사랑인 샬롯과 재회한 플라스키.
샬롯과 플라스키가 관계를 갖는 장면에서 샬롯이 내뱉는 대사, '원랜 이것보단 오래하는데'는 통상 남자 캐릭터의 전유물이었다. 지극히 의도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다. 이를 필두로 우리는 영화 곳곳에서 '유머'를 버무려 부담스럽지 않게 잘 만져놓은, 성 고정관념에 대한 (날 선 '비판'이 아닌) 재치 있는 '핀잔'을 만날 수 있다.
가령 영화 말미에 (조금 덜 유머러스하지만) 대통령이 된 샬롯을 여전히 희롱하는 무례한 남자 진행자들에게 한 방을 날리는 여자 진행자랄지, '영부군'이 된 플라스키가 '영부인'들의 초상화를 연이어 소개하다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초상화를 공개하는 장면 역시,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단 젠더 감수성에서 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정치, 종교, 인종 모든 편견과 선입견들에 대해 유쾌하게 저항한다. 남주인공인 플라스키, 그부터가 일단 은근한 인종차별주의자인 데다가 공화당과 기독교 혐오자이다. 자신의 신념과 대치되는 의견에 있어서는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허용치 않는다. 하지만 흑인인 그의 가장 친한 친구 '랜스'는 알고 보니 공화당원에 기독교 신자이다. (GOP와 GOD의 라임이란...) 플라스키의 성향을 알다 보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
이밖에도 영화 곳곳에서 랜스는 '이렇게 밝은 곳(white)은 처음이야'랄지, '여기서 흑인은 나랑 웨이터, 보이스투맨 밖에 없어. 벌써 세 명이나 와서 내 노래 잘 들었대'랄지, '(플라스키와 테일러 스위프트) 둘 다 백인이잖아'와 같은 대사들로 흑인에 대한 은근한 멸시와 차별에 대해 가벼운 냉소를 날린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 후반부 '와칸다여 영원하라!(Wakanda Forever!)'로 극에 달하는데, 이는 마블 세계관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국가로 근래 할리우드 흑인들이 인종차별에 유쾌하게 저항하는 최신 유행 문구라고.
물론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로코의 특성상 어쩔 수 없고 또 그래야 마땅한, 가볍고 뻔한 흐름에 너무 많은 메시지를 담으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건, 그 어떤 로코도 시도하지 못했던 (혹은 않았던) '진정한 아름다움', '나 자신의 소중함', '진실된 사랑' 이외의 주제의식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진일보한 로코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