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anne Kim Apr 23. 2019

[무비패스]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존재였느냐

삶이라는 여행의 리포트, 영화 <고양이 여행 리포트>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존재였느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이, 한 해 한 해 거듭할수록 가슴에 절절히 와 닿는다. 나도 한 때는 뜨거웠고, 내가 뜨겁게 아끼던 혹은 나를 뜨겁게 아끼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밥벌이를 시작하고 가정이 생기자 언제부터인가 피붙이가 아닌 존재에게 그만큼의 애정과 진심을 쏟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 외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멀어진 순수한 관계들에 대해 애써 자책을 거두곤 했다. 그러던 중 보게 된 이 영화 <고양이 여행 리포트> (旅猫リポート, The Travelling Cat Chronicles, 2018)는 내게 다시 아픈 질문을 던졌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존재였느냐고.



영화 <고양이 여행 리포트>의 일본과 한국 포스터



아키카와 히로(Hiro Akikawa)의 소설을 영화화 한 <고양이 여행 리포트> 시사회에 다녀왔다. 일본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간혹 일본 특유의 불편한 영화 문법 일색인 작품들이 있어, 검증되지 않은 시사회는 피하는 편이다. 가령 가족을 소재로 눈물을 짜내는 '쉬운 신파'랄지 교훈적 메시지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착과 그것을 풀어내는 세련되지 못한 표현, 대사 등에 대해, 나는 상당히 비관적인 축에 속한다. 특히 <고양이 여행 리포트>의 경우 예고편을 통해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다소 낯간지러운 설정을 미리 접해 더더욱 회의적이었다. 말하자면 일말의 기대도 없이 나는 시사회를 찾았다.



'사토루'는 고양이 '나나'의 차기 집사 간택을 위한 이별 여행을 떠난다.



화자는 도도한 길냥이 '나나'이다. 나나에게 호감을 보이던 '사토루'는 차에 치인 그를 구해준 것을 계기로 집사로 간택된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나나를 맡아 키울 수 없게 된 사토루는 후임 집사를 찾기 위해 나나와 여행 길에 오른다. 흔쾌히 '내가 맡아주마' 손을 내민 고맙고 소중한 이들, 옛 친구, 첫사랑 등을 차례로 만나는 사토루. 그 과정에서 사토루의 지난 삶의 면면이 한 꺼풀씩 드러난다. 새로운 집사를 찾기 위한 사토루와 나나의 여행은 어느새 사토루의 '삶'이라는 여행을 복기하는 리포트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토루의 방문은 선물처럼, 소중한 이들의 치유와 성장을 돕는다.



코스케 ; 유년 시절의 슬픔과 코스케의 성장


어린 시절의 '사토루'와 나나를 쏙 빼닮은 고양이 '하치'


가장 먼저 찾아간 이는 바로 사토루의 초등학교 시절 친구인 코스케. 회사를 그만 두고 아버지의 사진관을 이어받은 그는 결혼까지 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고양이도 생후 반면이면 홀로서기'를 하는데,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입이 얼어붙어 아내에게 막말을 퍼붓는 에게 제대로 대응조차 못 했다. 급기야 아내는 친정으로 가버렸다. 코스케도 아내도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오래 전부터 고양이라면 질색하던 아버지때문에 키울 생각일랑은 꿈에도 못 해봤다. 사토루의 고양이를 맡아 돌보면 아내가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본다.


코스케와의 만남은 '나나'를 쏙 빼닮은 오래 전 사토루가 키우던 고양이 '하치'를 매개로, 사토루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엄마와 약간의 다툼이 던 다음 날, 수학여행에서 '화해의 선물'로 요지야의 기름종이를 사 가려던 코스케는 부모님의 교통사고로 그 기회를 잃고 만다. 장례식장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못 하던 사토루. 그런 그에게 코스케가 요지야의 기름종이를 건내자, 사토루는 그제서야 억눌러왔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터져 눈물을 쏟는다. 하루 아침에 부모님을 잃은 사토루에게 고양이 하치는 하나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출장이 잦고 관사에 거처하는 이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 하는 수 없이 먼 친척에게 그를 맡긴다.


그런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던 코스케는 아버지에게 사토루를 위해 하치를 맡아 키우면 안 되겠느냐고 묻지만 단칼에 거절당하고, 아버지에 대한 환멸로 난생 처음 '아버지가 정말 싫어요!'를 외치고 뛰쳐나가 주먹을 부들부들 떤다. 그 때로부터 조금도 발전이 없는 코스케의 모습에 사토루는 너희 부부만의 고양이를 찾으라고 조언하며, 나나와 함께 돌아선다. 사토루가 떠나자 코스케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 한다. "우리 새 고양이를 찾자. 아버지는 내가 알아서 책임질게." 사토루, 나나와의 만남은 코스케로 하여금 해묵은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게끔 돕는 계기가 된다.



스기 - 치카코 ; 첫사랑의 아픔과 스기의 치유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스기'와 '치카코'는 어느덧 부부가 되었다.


사토루가 두 번째로 찾아간 집사 후보는 스기와 치카코 부부. 스기와 치카코는 태어날 때 부터 단짝이었고, 사토루와는 고등학교 시절 함께 물에 갇힌 개를 구해준 것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남몰래 치카코를 좋아하고 있던 스기는 치카코와 사토루가 동물에 대한 애정 바탕으로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을 키우기 시작하자 불안해진다. 결국 스기는 사토루에게 오래 전부터 치카코를 좋아해왔다는 간청 아닌 간청을 하게 되고, 사토루는 표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애써 담담한 척 마음을 접는다. 세월이 흘러 스기와 치카코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개와 고양이를 동반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 사토루와 나나가 이들 부부의 게스트하우스를 찾자 스기는 내내 불안해 하고, 스기의 개는 주인의 불안감을 알아채고 전에 없이 거칠게 짖는다.


결국 스기의 개 때문에 이들 부부 역시 집사 후보에서 탈락하고 사토루는 다시 길을 나선다. 막 떠나려던 찰나,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 사실 고등학교 때 너 좋아했어. 몰랐지?" 가벼운 농담하듯, 의도적으로 조금의 무게도 싣지 않은 듯한 사토루의 고백. 사토루의 마음을 가로막았다는 죄책감과 혹여 치카코가 사토루도 자신을 좋아다는 사실을 알게될지 모른다는 려움에 내내 불안에 떨던 스기는, 작별인사하듯 가볍게 던진 이 한 마디에 순간 당황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재밌었겠네"라며 마찬가지로 가볍게 받아치는 그녀를 보며 이내 안심한다. 떠나는 사토루의 뒷모습과 자신의 팔을 굳게 잡은 치카코보며,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 죄책감과 불안감이 눈녹듯 사라진다. 얼핏 보면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는 사토루의 이 뒤늦은 고백은 사실은 자신이 사랑하는 소중한 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리고 이 고백조차 실은 전날 설핏 비친 스기에 대한 치카코의 진심어린 마음을 확인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녀가 흔들릴 여지가 있어 보였다면 사토루는 그런 농담같은 고백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고백은 마음 한 구석에 빚처럼 남아있던 스기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치유해 주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약을 찾아 먹는 사토루의 모습이 그의 건강 상태를 암시한다.



이모 ; 가족사의 비밀과 작별 준비


사토루가 부모님을 여의자 선뜻 맡아 돌봐준 이모 '노리코'


결국 집사 간택에 실패한 사토루는 이모 '노리코'에게 돌아간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사토루를 대신해 고양이 나나를 돌보기 위해 이모는 판사 까지 포기하고 이사를 했다. 결국 다시 데리고 와서 미안하다고 말 하는 사토루도 사실 내심 바랐던 바인듯 안심돼 보인다. 사토루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이모는 대뜸 오래 전 자신이 사토루에게 줬던 상처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한다. 오래 전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사토루에게 이모는 '어차피 알아야 할 일이니 미리 말 한다'며 충격적인 사실을 들려준다. 사실 사토루의 부모님은 친부모가 아니며 자신이 맡았던 사건의 피의자들이 사토루를 유기한 것을 부모님이 거두어 키웠다는 것. 막 부모를 떠나보낸 아이에겐 더없이 잔인한 처사였다. 하지만 이를 회상하며 사토루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라고, 그 때 말해줘서 좋았다고. 덕분에 자신은 내가 제일 불행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행운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사실 이 대화를 사토루의 유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불행했지만 결코 불행하지 않았노라고, 자신은 행운아였고 충분히 행복했었노라고. 영화 저변에 깔려있는 사토루의 시선은 그렇게 말 하고 있다.


이후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진 사토루는 입원을 하고 고양이 나나와 애끓는 작별을 한다. 이후 이모를 따라 병문안을 가게 된 나나는 탈출을 감행하고 사토루가 산책을 나오는 해변가에서 길고양이로 전전하면서까지 사토루의 곁을 맴돈다.



나나 ; 소중한 존재, 그리고 기억


사토루와 고양이 나나


결국 사토루는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 곁을 지키던 이모는 '누구 더 인사할 사람 없냐'는 말에 고양이 나나를 찾아 나서고 마침 불안한 예감이 든 나나는 병원 문 앞에서 애타게 사토루를 찾고 있다. 이모와 나나의 곁에서 눈을 감는 사토루는 마지막으로 '고마워'라는 말을 남긴다.


"너는 떠났지만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너를 그리워 하고 있어." 사토루는 떠났지만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를 추억한다. 어느덧 자신만의 고양이를 찾은 코스케와 더욱 단단해진 스기와 치카코 부부, 안정을 되찾은 이모, 그리고 나나. 사토루의 삶은 과연 행복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아니 고양이 나나를 포함한 많은 존재들에게 소중한 존재로, 뜨거웠던 존재로 기억되고 있으니.



과연 나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그처럼 뜨거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단순히 '애묘인'을 위한 영화로 읽히지 않는 이유이다. 과거 뜨거웠던 이들에게 농담같은 안부 인사를 건네고 싶어지는 영화, 지금이라도 집사가 되어 단 하나 뿐인 소중한 존재가 되어보고 싶은 영화, <고양이 여행 리포트>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라는 이름의 예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