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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Kim Feb 28. 2019

'삶'이라는 이름의 예술

삶이 삶을 변화시킨다, 영화 <타인의 삶>




삶을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예술이고,
우리 모두는 오늘이라는 작품을 만지는 예술가이다.

삶이 삶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인간, ‘타인’에 의해.



지난해 개봉한 영화 <완벽한 타인> (Intimate Strangers, 2018)은, 이탈리아 원작을 바탕으로 결국 모두가 ‘타인’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말한다. 덕분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이면 나 아닌 모두가 의심스럽다. 설마, 너도? 다투는 커플이 그렇게 많았다는 후문. 영화 자체는 만족스럽게 보았지만서도 마음 한 켠에 씁쓸함이 일었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명제가 공식화 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서일까. 그 때, 오래 전 보았마찬가지로 ‘타인’을 주제로 한 영화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2006)이 떠올랐다. 두 영화 모두 타인과 비밀을 다루지만, 메시지는 판이하다.


영화 <완벽한 타인>과 <타인의 삶>은 '타인'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망한다.


때는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던 1984년,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목표 하에 10만 명의 감청요원과 20만명의 스파이가 독재정권을 위해 활동 중’인 동독이다. 비밀경찰(슈타지)의 정보국 요원 ‘비즐러’는 오로지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충성이라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냉혈인간이다. 사건은 그가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으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삶을 훔쳐보며 비즐러는 점차 동화되고, 감시를 지시한 장관이 크리스타를 빼앗기 위해 계략을 펼친 것임이 드러나자 급기야는 이들을 돕기에 이른다. 하지만 결국 내막이 들통나 우체국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베를린 장변이 붕괴된 이후 드라이만은 자신들을 도운 비밀경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돼 그를 찾지만 앞에 나서지 않고 대신 그를 위해 작품을 헌정한다.


변화 ; 인간성의 회복


이들의 삶을 감청하며 비즐러는 점진적으로, 하지만 폭풍과 같이 변화한다. 그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들이 몆 가지 있다. 가장 먼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돈독한 애정을 통해 난생 처음 ‘외로움’을 느낀 그는 방으로 매춘부를 들인다. 볼 일을 마치고 떠나려는 매춘부를 잡고 그는 애원한다. “좀 더 있어줘.” 이는 단순한 정욕이나 체온에의 갈구를 넘어, 애정,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다음 날, 그는 드라이만이 집을 비운 사이 브레히트의 ‘시집’을 빌려(?)온다. 전이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애정시를 조용히 음미한다. 급기야는 드라이만이 예르스카를 추모하며 연주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 날 퇴근 길, 엘레베이터에서 만난 비밀경찰을 험담하는 아이에게 비즐러는 '이름'을 묻는다. 순간 관객은 긴장한다. 앞서 부하직원의 이름을 묻는 '그루비츠'의 사례를 통해,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곧 '징벌'을 뜻한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 '우리 편'이 된 줄 알았던 비즐러가 다시 무서운 정보국 요원으로 돌변하나 싶은 순간, 그는 "공. 그 공 이름 말이야."하고 덧붙인다. 그리고 며칠 뒤, 크리스타가 드라이만의 만류를 제치고 장관을 만나러 나가자, 늘 소다수만 마시던 그는 착잡한 마음에 ‘보드카’를 주문한다. 외로움, 감성, 눈물, 관용, 쾌락. 즉,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을 마침내 자신의 삶에 들여놓는다.


비즐러는 전에 없던 '외로움'을 느낀다.
브레히트의 '연애시'를 읽는 비즐러
드라이만이 예르스카를 추모하며 연주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듣고 눈물 흘리는 비즐러
비밀경찰을 험담하는 아이에게 비즐러는 아이의 이름 대신 공의 이름을 묻는다.
여느 때처럼 소다수를 주문했다가 취소하고 '보드카'를 주문하는 비즐러


개입 ; 감시자에서 수호자로


이후 비즐러는 이들의 삶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절대자'로서의 단순한 배려였다. ‘초인종’을 울림으로써 드라이만이 크리스타에 대한 헴프 장관의 흑심을 알게 한 것. 나아가 후에는 직접 ‘대화’를 하기에 이른다. 드라이만의 만류를 뿌리치고 헴프 장관을 만나러 나온 크리스타에게 '나는 당신의 관객이고 당신은 훌륭한 배우'라며 용기를 주고, '이미 예술을 하고 있는데, 예술을 위해 자신을 팔 이유는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타는 말한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군요. "


이제 비즐러는 '감시자'가 아닌 충실한 '수호자'로서 임무를 수행한다. 국경을 넘어 서독에 가는 것을 모의하는 드라이만 일행을 신고하려던 비즐러는 결국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이번 한 번만 봐주겠어, 친구" 나아가 후에는 자유주의 서독 잡지 <슈피겔>에 투고할 원고를 준비하는 일행을 눈감아준다. '특별히 보고할 만한 사항 없음’ 심지어는 미심쩍어하는 동료 요원에게 ‘공동 시나리오 작업 중이니 주제넘는 판단은 하지 말라’며 나무라기까지 한다. 상부에 보고할까도 잠시 고민하지만 결국 그만둔다.


후에 크리스타가 볼모로 잡혀오자 하는 수 없이 심문을 하는 비즐러. 하지만 그는 크리스타와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한 '관객'이라는 표현을 반복해 사용함으로써, 상관의 눈을 피해 자신이 같은 편임을 알리고자 애쓴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크리스타로 인해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크리스타는 드라이만의 비밀을 실토한다. 수호자로서 그의 역할은 위기에 처한 드라이만을 위해 증거품인 ‘타자기’를 숨기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전력을 다 해 이들을 지키고자 한 비즐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크리스타는 죽음을 맞고 드라이만은 실의에 빠진다.


'초인종'을 울려 드라이만에게 비밀을 알리는 비즐러
비즐러는 혼란스러워하는 크리스타에게 대화를 시도하고,그를 통해 용기를 얻은 크리스타는 결국 장관의 스폰서 유혹을 물리치고 연인에게 돌아간다.
드라이만 일행의 모의를 눈감아주는 비즐러
심문 중, 비즐러는 크리스타에게 용기를 줄 때 썼던 표현인 '관객'을 반복해 사용하면서 같은 편임을 암시하고자 애쓴다.
크리스타가 드라이만의 반 정부 행위를 실토하자 비즐러는 증거품인 '타자기'를 미리 숨긴다.


보상 ; '타인'과의 연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자신을 보호해준 비밀경찰의 존재를 알게 된 드라이만은 비즐러를 찾지만, 앞에 나서지 않고 돌아선다. 대신 통일 후 그만 두었던 작품 활동을 재개해 2년 간 신작에 몰두하고, 마침내 세상에 나온 책의 맨 앞 장에 이렇게 적는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HGW XX/7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다시 쓰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예술가로서로의 활동, 나아가 삶을 지켜준 그에 대한 가장 적합한 형태의 보상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타인' 비즐러는 계속 타인으로 남는다. 만일 드라이만이 단숨에 비즐러를 찾아가 손을 맞잡고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면, 이 영화의 의미는 퇴색됐을 것이다.


영화는 책을 포장해 줄지 뭇는 점원에게 비즐러가 ‘아니요, 저를 위한 책입니다.’라고 답하며 끝을 맺는다. 자신이 볼 책이라는 의미와 책 자체가 드라이만이 자신을 위해 쓴 책이라는 중의적 표현이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비즐러의 표정은 잔잔하지만 굳건하다. 의도치 않았지만 마침내 손에 쥔 '보상'에 대해, 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이성적이고 배타적이었던 자신의 삶이, '타인'과의 보이지 않는 연대를 통해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변화 하였음을 뜻한다.


짐짓 덤덤한 척 하지만 힘주어 말하는 '저를 위한 책입니다'에서 그의 만족을 엿볼 수 있다.


희망 ; 삶이 삶을 변화시킨다

혹자는 이 작품을 ‘예술에 대한 찬양’으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힌트는 영화 초반부에 숨겨져 있다. 헴프 장관은 드라이만의 초연 축하 행사에서 ‘작가는 영혼을 만지는 수리공’이라는 ‘레닌’의 말을 인용해 축배를 든다. 하지만 직후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드라이만에게 “인류애,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 솔직히 자네가 아무리 작품에서 주장해봤자 인간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앞서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한다.


그러나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영혼을 만지는 데에 성공한다. 그는 비즐러를 변화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예술적 신념을 증명해낸다. 결국 드라이만의 최대 작품은 비즐러 그 자체인 셈이다. (비즐러 = 작품) 그리고 그 수단은 그가 만든 연극도 책도 아닌 그의 삶 그 자체였다. 즉, 여기서의 ‘예술’은 그의 삶 자체이다. (삶 = 예술)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다. 삶을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예술이고, 우리 모두는 오늘이라는 작품을 만지는 예술가이다.


레닌의 표현을 인용한 헴프 장관의 축사
헴프 장관은 '인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드라이만의 신념을 비웃지만, 결국 드라이만은 자신의 '삶'을 통해 비즐러를 변화시킨다.


인간은 변화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인간, ‘타인’에 의해. 여기서 비즐러를 변화시킨 ‘타인’은 비단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로 국한되지 않는다. 20C 초반의 시인 브레히트, 작중 미상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의 작곡가, 나아가 베토벤도 시대와 국경을 넘어 그를 변화시킨 장본인이다. 삶이 삶을 변화시킨다. 물론 예술도, 삶의 한 영역으로서 인간을 변화시킨다. 과연 예술에 대한 찬양인가. 그보다는 한 인간의 ‘삶’이 또 다른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의 '희망', 결국 드라이만이 작품을 통해 말하려던 그 ‘인류애’가 이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타인은 지옥인가. 판단, 혹은 '선택'은 어디까지나 우리 개개인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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