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영화 <헤어질 결심>의 여운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번지듯이 서서히 오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금방 떠나지만, 잉크는 느리게 번진 만큼 더 오래 머무른다.
내가 오래간 좋아하는 영화는 대체로 처음 보고 난 후 '충격적이다'거나 '센세이셔널하다'는 감상보다는 "그랬구나..." 하게 되는 영화였다. <헤어질 결심>은 그런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에는 마음이 잔잔하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뇌막을 뚫고 뇌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도 영화가 남긴 진한 여운이 뇌막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 진다. 그렇게 엔딩 크레디트가 거의 다 올라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다 보면 어느새 암전 된 화면을 발견하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그 후, 드디어 영화에 대한 생각들이 뇌막을 뚫어 파고 들어갔는지 머릿속은 온통 그 영화의 장면 장면들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다. 문득 일상의 어떤 대상을 보고도 영화의 대사나 장면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마치 물에 잉크가 번지듯이, 서서히 그 영화에 물든다. 그렇게 하여 '내가 이 영화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 영화를 다시 본다. <헤어질 결심>은 나에게 그런 영화였다.
서래의 사랑의 방식
극 중에서 서래가 해준을 사랑하는 방식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방식은 서래가 해준의 것들을 ‘기억에 담는’ 방식이 아닐까.
서래는 해준의 사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해둔다. 그러한 기억 행위의 클라이맥스는 단연코 엔딩이다. 해준은 극 중에서 서래에게 피가 많은 현장을 두려워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 지점을 떠올려 보고 영화의 마지막을 다시 곱씹어 본다면, 서래가 해준에게 남긴 미결 사건은 해결이 되더라도 해준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피를 남기지 않는 현장, 해준이 두려워하지 않을 현장. 어쩌면 서래는 ‘깊은 바다에 던져서 아무도 못 찾게’ 하라는 해준의 말에 더불어 이러한 방식을 통해 해준에 대한 사랑의 흔적을 더 세심하고 짙게 남겨두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서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서래가 이포에 온 이유에 대한 것일 테다.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라는 해준의 대사와 함께 후에 나오는 서래의 "나 그거 좋아해요. 늘 하던 대로 편하게 대해주세요, '피의자'로."라는 대사는 서래가 해준을 사랑하고 그리고 기억에 담아 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어딘가 닮아 있는 서래와 해준
서래와 해준이 비슷하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장면은 절 신이었다. 해준의 대사를 통해 언급이 되는데, 이때 해준은 "서래 씨가 나하고 같은 종족이란 거, 진작 알았어요."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해준의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서래와 해준이 말을 하면서 풍기는 분위기가 닮아 있음을, 같은 결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은연중에 느낀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 그들의 주변 인물이 둘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그들이 주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주변 인물이 서래와 해준을 묘사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영화에서는 '에이스'라는 단어가 두 차례 정도 등장하고, 각각 서래와 해준을 지칭하기 위해 쓰인다. 첫 번째는 간병인 소개소에서 등장한다. 소개소를 찾아온 해준이 서래의 평소 근태를 묻자, 소개소의 실장은 서래가 '업체 에이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라 양식장 비닐하우스에서 연수에 의해 언급된다. 팀장인 해준이 '에이스'라고 언급한 것.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헤어질 결심 각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인 것으로 보아, 김신영 배우분이 연수를 연기하면서 일종의 애드리브로 추가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서래와 해준을 직장에서 만나던 주변 사람들은 둘을 똑같이 해당 업계의 '에이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이 닮아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서래와 해준이 주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닮아있다. 영화에서 가장 주된 색감으로 쓰였던 '녹색으로 보였다가 파란색으로 보였다가 하는' 청록색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화 속에서 오직 서래와 해준만이 일치한다. 서래는 해준과의 메시지에서 녹색으로 보였다가 파란색으로 보였다가 하는 공책을 두고 '녹색 공책'이라고 언급하고, 해준은 서래의 원피스를 보고 처음에 '녹색 원피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래와 해준을 제외한 다른 등장인물들의 경우에는 달랐다. 정안은 서래의 원피스가 '파란색'이라고 하고, 서래를 목격한 사람들도 '파란색'이라고 하며, 연수 또한 목격자들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는 "파란색 맞네."라고 반응한다. 녹색으로 보였다가 파란색으로 보였다가 하는 그 청록색 물체들을 두고, 오직 서래와 해준만이 같은 시선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서래의 고풍스러움, 해준의 품위
서래와 해준은 서로에게 고풍스럽다, 품위가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때 서래의 고풍스러움은 언어에서 나오고, 해준의 품위는 마음과 행동에서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해준이 말했듯이 서래는 사극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를 따라 하고 연습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서래는 늘 단어 하나하나도 보통의 현지인들보다는 '고풍스럽다'라고 느껴질 만한 어휘를 구사한다. '마침내', '단일한'부터 시작하여 문장 단위로까지, 서래의 말씨에서는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
해준의 품위는 역시나 해준이 스스로 말했듯이 '자부심'에서 온다.
그러나 서래의 언어를 통해 흘러나온 고풍스러움은 해준의 마음에서 나온 품위를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해준은, 아내인 정안을 두고 서래에게 애정을 보여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자부할 수 있던, 그렇기에 품위가 있던 해준은, 서래에게 품위가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 서서히 품위를 잃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래의 고풍스러움, 꼿꼿함,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해준의 품위를 앗아간다.
엔딩
서래는 영화의 엔딩에서 이포 바다에 양동이를 들고 간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영화의 초중반부에서 서래가 죽은 까마귀를 묻어줄 때에도 양동이를 썼다는 점이다.
까마귀를 묻어주며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주세요."라고 했던 서래가, 자신을 그 까마귀와 똑같은 방식으로 바다에 묻으며, 마침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렇게 산 정상에서 시작한 서래의 이야기는 바다 깊은 곳에 미결로 남아 묻히게 된다.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해준의 마음을 '무너지고 깨어짐' 이전의 상태로 돌려주기 위함이었고, '그런 남자'와의 결혼이었고, 죽음이었다. 해준을 향한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래는 헤어질 결심을 해낸다. 그렇기에 죽음을 향한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결코 치기 어린 말이 아니다. 장해준 네가 벽에 미결로 남겨진 내 사건 사진들을 보면서 하루 종일 내 생각만 하며 고통받았으면 좋겠어, 하는 복수심만이 아니다. 그런 이기심과 함께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돌려주고 싶다는 이타심은, 모순적이게도 서래의 마음속에서 공존한 것이다.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치고 무너지고 깨어진 해준의 품위를 되찾아주기 위해 녹음 파일이 있는 휴대전화를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말함과 동시에, 평생 자신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자신만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박찬욱 감독님의 말처럼 사랑에는 결심이 필요 없지만 헤어짐에는 결심이 필요했다. 해준은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했기에, 기념일을 월 단위로 세는 정안에게 '그걸 세고 있냐'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지난 402일 동안'이라며 서래와 떨어져 있던 날들을 일 단위로 언급하였고, 미결로 남겨진 서래의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서래 생각만' 하게 될 것이다. 서래에게는 있었던 헤어질 결심이 해준에게는 없었으니까. 언제나 고통스러운 건 남기고 떠난 이가 아닌, 남겨진 사람이었으니까.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해준은 미결로 남겨진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해준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응어리진 채 녹지도 풀리지도 않고 꽁꽁 뭉쳐 있는 서래를 향한 단단한 마음이 남아 있지 않을까.
你说爱我的瞬间,你的爱就结束了,
你的爱结束的瞬间,我的爱就开始了啊。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