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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t Jan 06. 2023

비극의 한 복판에서 들리는 경쾌한 리듬만큼 아이러니한

영화 <조조 래빗>

일생일대의 참혹한 비극이 펼쳐지는 그 한복판에서 경쾌한 리듬을 타며 흘러 들려오는 비틀스와 데이비드 보위의 록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것들을 천천히 해나가야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밖으로 나가, 다 같이 춤을 추자.


<조조 래빗>은 곱씹는 맛이 있는 영화다. 처음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왔을 때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볼만한 영화구나'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를 본 그날, 집에 가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이 영화의 이야기들과 인물들이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녔다. 결국 VOD를 사서 몇 번이고 돌려보게 되었고, 볼 때마다 질리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섬세함이 눈에 더 뚜렷하게 보인다.


무거운 소재를 다룬 무겁지 않은 영화

어떤 특정 시대의 특정 사건을 다룬 영화는 대부분 어둡고 잔인하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전시의 상황을 다룬 내용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한국 영화들의 소재를 예로 들자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이 그렇다.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사건들과 그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들. 그런 영화를 절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의미 있는 영화들이고 올바르게 역사를 인식하게 해 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조조 래빗> 초반부의 로지 베츨러가 교수대 앞에서 조조의 고개를 고정하며 나치 독일의 끔찍한 현실을 직시하라고 하듯이 말이다. 다만 그런 영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때론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자극적이고 잔인한 영화의 매 장면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현실을 화면으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내용들을 최대한 트리거 소재 없이 다룬 영화들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으로 치면 <아이 캔 스피크> 같은 영화가 그 일례이다. <조조 래빗>은 당연히 그 영화와는 다른 시공간과 다른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무거운 소재를 너무 무겁지 않게 다루면서도 직시해야 할 역사와 현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는 폭탄을 어린아이들의 몸에 둘러주고는 ‘가서 미국인들을 끌어안'으라며 자폭을 유도하는 걸 보고 정말 손 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고 웃고 있는 클렌젠도프(샘 록웰). 슬로모션으로 연출한 장면들. 우스꽝스럽게 깔리는 배경 음악. 이 장면처럼 특히나 해학적으로 다소 가볍게 표현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극적이고 잔인해 보이는, 그런 장면들이 다수 있었다. 전쟁과 홀로코스트라는 그 잔인함을 최소화해주고 상처 입은 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비극성은 짙어진다. '신랄한 풍자극'이면서도 저렴해 보이거나 유치하지 않은, 교훈적인 영화이다.


배우들의 연기와 억양

배우들 연기도 빠질 수 없는 좋았던 부분이다. 조조가 다친 것을 본 후 로지가 클렌젠도프에게 찾아가는 장면은 영화 개봉 전부터 영상을 돌려보며 스칼렛의 악센트에 놀랐다. 그 특유의 악센트가 정말 완벽했다. 아역 배우들은 인터뷰를 보니 대체로 원래 악센트가 있는 아이들이라 자연스럽게 연기한 것 같던데 스칼렛은 전형적인 미국식 버터 발음인데도 버터 끼를 싹 빼고 유럽 억양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도 로지의 감정선은 그대로 살렸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칼렛이 아니라 다른 많은 배우들도 그랬을 테지만 말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마 많은 이들이 꼽을 듯한 장면이다. 아빠가 보고 싶다며 엄마에게 다소 함부로 대하는 조조의 말을 듣고 세 손가락으로 턱에 숯을 바르고 재킷을 입고는 화를 내고 사과하는 장면. 조조의 아버지와 어머니 역을 오가면서 오르내리는 감정선을 그대로 비추어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역 배우의 연기도 정말 좋았고. 타이카의 연기도 괜찮았다. 배우들이 전체적으로 악센트를 정말 잘 살렸다. 정말 연습을 많이 했겠구나 싶었던 지점이다.


복선과 상징

1) 발과 구두

영화 예고편에서도, 영화 내에서도, 로지의 발과 발목 부분만 비춰주는 장면이 꽤 있다. 그것도 구도가 꽤 특이하다. 보통 탭댄스를 추는 등의 장면에서 발을 확대하여 보여줄 때에는 다리가 꽤 많이 나오게 찍거나 살짝 위에서 발을 찍어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애매하게 발목 언저리를 자꾸 보여준다. 대체로는 특유의 신발과 코트, 바지 아랫단이 보이게 찍는다. 로지는 항상 조조의 뒤에 있는 꽤 높은 단에 올라가서 있고, 그래서 항상 조조의 얼굴과 로지의 신발, 다리가 함께 보인다. '뭐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부분이 복선일 줄은 몰랐다. 나비를 쫓아가던 조조의 눈높이에 딱 맞게 발과 다리가 보인다. 익숙한 신발과 바지, 그리고 푸른색 코트.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것이다.

영화 전반부에서 이에 대한 복선은 또 등장한다. 교수형에 처해진 이들을 보며 저들이 무얼 한 것이냐 묻는 조조에게 로지는 대답한다.

What they could.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을 한 로지. 그런 로지의 최후는 교수형에 처해진 그들과 같았다.

로지의 풀린 신발 끈을 묶어주려다가 조조는 끝내 묶지 못한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에는 조조가 잘못 본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옷차림의 다른 사람이겠거니, 했다. 다리를 끌어안고 우는 조조를 비추어주면서 로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조조가 고개를 들어 멀쩡하게 살아있는 로지와 눈을 마주할 줄 알았다. “What are you doing kid?”라고 하면 조조는 그제야 자신이 잡고 있던 이가 로지가 아니었음을 깨닫고 로지에게 달려가 끌어안는, 그런 전형적인 연출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로지의 신발 끈을 묶어주려다 실패하고 다시 다리를 끌어안고 울고. 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고는 다시 다리를 끌어안고 울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 좋은 사람이 푸대접을 받는 사회는 얼마나 끔찍한 사회인가.

그 하나의 비극적인 장면을 위해 영화 속 곳곳에 숨겨둔 복선이 참 인상적이었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넘기고 있던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모두 복선으로 회수된다. 한 마디로 버릴 장면이 없다.

2) 신발 끈

로지의 신발만큼이나 조조의 신발도 자주 클로즈업이 되어 등장한다. 아직 어려서 조조는 신발 끈조차 제대로 묶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이렇게 신발 끈을 묶을 줄 모르는 조조의 모습은, 그 정도로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분위기와 흐름에 녹아들어 나치를 외치는 것에 대한 풍자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로지의 죽음과 함께 신발 끈의 꽤 다른 역할이 드러난다. 로지의 신발 끈을 묶어주려다가 실패하고 우는 조조의 모습. 그리고 영화 거의 말미에서 조조는 집의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엘사의 신발 끈을 직접 묶어준다. 순수함을 속에 품고는 정치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애어른’ 조조로 대표되는 당대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는 역할에서, 조조와 로지의 추억을 환기하는 역할로. 그렇게 조조의 신발 끈은 영화 속에 스며든다.

3) 푸른 나비

영화 복선으로 나비도 빠질 수 없다. 복선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소재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이 나비는 사랑과 비극을 동시에 상징한다.

첫 번째로 나비가 언급된 것은 로지의 말에서이다.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로 사랑이 무엇이냐 묻는 조조에게 로지가 처음으로 나비에 대해 언급한다. 사랑에 빠지면 배에서 나비들이 우글우글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이후 실제로 조조가 엘사와 사랑에 빠졌다고 느꼈을 때에는 조조의 배가 클로즈업되며 날아다니는 나비를 CG로 처리하여 연출한다.

그리고 길가에서 나비를 쫓던 조조는 눈앞에 있는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로지의 죽음이라는 비극. 이렇게 나비는 조조의 사랑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여준다. 조조의 한 여자와의 사랑의 시작을, 그리고 조조의 엄마와의 사랑의 표면적 종식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특히 서양권에서 푸른 나비는 죽은 여인의 영혼을 의미한다. 긴소매의 옷을 입는 날씨에 조조는 돌로 된 길에서 낮게 날아다니는 푸른 나비를 발견한다. 애초에 쌀쌀한 날씨에 나비가 돌길에서 낮게 날고 있는 것도 흔한 풍경은 아니다. 이 나비는 어쩌면 로지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명을 다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서 맴돌고 있던 로지의 영혼. 그 나비를 따라가자 조조가 발견한 것은 공중에 떠 있는 로지의 발과 구두. 그렇게 나비와 함께 조조와 로지의 '표면적' 사랑은 종식된다. ('표면적'이라고 계속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로지의 육체가 없더라도 그 영혼을, 그와의 기억을, 조조는 계속해서 곱씹으며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춤

로지의 위 대사와 함께 춤의 상징성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한 춤을 추는 로지. 그리고 그 춤의 상징성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마침내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모든 악랄한 사태가 종식되었을 때, 조조와 엘사는 문밖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그 춤에 깔리는 배경 음악은 데이비드 보위의 'Heores'였다. 베를린 장벽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냉전 시대 당시 분리된 독일을 상징하는 곡. 그 곡을 배경으로 조조와 엘사는 전쟁의 종식으로 만끽한 자유를 노래하고 춤춘다.

또 빠질 수 없는 춤 장면은 로지와 조조가 밥을 먹다가 춤을 추는 장면이다. 그 장면은 어쩌면 그 전쟁 상황의 유일한 탈출구, 도피처로서의 춤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깥은 나치 정권이 팽배한 암울한 시대였지만 로지와 조조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환하게 웃으면서 춤을 춘다. 노래는 'The Dipsy Doodle.' 꽤 신나는 음악이다. 바깥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토록 암울한 시대 속에서 그들이 찾은 자유, 그들이 찾은 일시적인 탈출구, 그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들 자신과 서로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춘 춤. 누군가는 그 시대 속에서도 자유를 찾았고 삶을 축복이라 여겼음을.


요키와 기회주의적 태도

요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당대의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을 비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It’s definitely not a good time to be a Na*i’라는 대사나 ‘난 정말 어떻게든 살아남을 운명인가 봐’ 이런 대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아남고자 나치로 살다가 나치로 살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절대 죽지 않는다. 그 생명력이 너무도 끈질기고 꾀는 깊어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요키가 꾀를 부린 것은 물론 아니지만 현대의 우리가 비판하는 당대 기회주의자들의 모습이 딱 저러하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요키는 단순히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면서도 기회주의자를 연상시킨다.




Let everything happen to you. Beauty and terror. Just keep going. No feeling is f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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