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선자령 백패킹
백패커라면 다들 알고 있는 백패킹 3대 성지가 있다. 굴업도, 선자령, 비양도가 그곳이다. 우리는 그중 하나인 선자령으로 출발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횡계터미널에 내린 후 우선 점심식사를 했다. 지도에서 채식이 가능할 법한 식당을 고심하다 감자옹심이 집을 발견했다. 강원도에 오면 감자옹심이를 꼭 한 번은 먹게 되는 것 같다. 동글동글하고 쫄깃한 감자옹심이의 식감이 입맛을 돋운다. 강원도에 오니 괜히 감자 맛이 더 좋은 것 처럼 느껴진다.
점심을 먹고 택시를 이용해 선자령 들머리인 대관령 마을 휴게소까지 향했다. 택시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서 이미 아름다운 산 능선과, 선자령을 떠오르게 하는 풍력발전기들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능선을 바라보니 기대감이 부풀었다. 택시로 15분 남짓 달려 들머리에 도착했다.
등산길로 들어섰다. 선자령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들어선 곳은 한동안 포장된 길이 이어져서 걷기 좋지 않았다. 선자령까지 찾아와서 굳이 포장도로를 걷고 싶지 않았다. 흙길은 언제 나오나 생각하며 걷다보니 곧이어 대관령 국사성황사에 도착했다. 길은 사찰 옆으로 난 나무 계단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곳에서부터는 흙길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른 능선의 선자령이 금방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왜 그리 쉽게 생각했을까. 주로 선자령의 푸른 초지 사진만을 봐온 지라 금방 그와 같은 풍경을 마주할 줄 알았다. 등산길에서는 아름다운 산 능선이 보이지 않았다. 선자령 등산로는 조망이 트이는 등산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한 산길을 느긋하게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편안해졌다.
군데군데 귀여운 진달래와 야생화가 피어있었다. 꽃에 눈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어느새 선자령 능선의 풍경이 보였다. 가로로 드넓게 펼쳐진 정적인 풀밭과 대조적으로 거대한 풍력발전기는 저 홀로 움직임을 갖고 있었다. 조용한 초지의 모습과 달리 거대한 소리를 울리며 돌아가는 풍력발전기가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이색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박지를 지나 선자령 정상에 먼저 들렀다. 유난히 거대한 선자령의 정상석이 올라오는 이들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봐오던 선자령 정상석을 마주하니 마치 유명인을 만난 것 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선자령 정상에서는 오히려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무로 둘러싸여 시야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흙밭에 정상석만 우두커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초지로 돌아왔다. 정상에서 돌아 나오면 바로 사람들이 텐트를 치는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선자령의 바람은 그 명성처럼 거칠었다. 가벼운 소품들이 바람에 날아갈 새라 챙기기 바빴다. 텐트 플라이를 체결할 때는 바람을 이겨내느라 원단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바람이 강하면 실제 온도보다 체감온도가 더 추워진다고 한다. 우리는 집을 짓자마자 챙겨 온 패딩을 입고 잠시 쉬었다. 패딩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해와 구름의 싸움처럼 선자령의 거센 바람은 우리를 웅크리고 옷을 더욱 여미게 만들었다. 작게 숨을 뱉으면 하얀 입김이 보일 정도 였다.
한 숨 돌리고 나서 박지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텐트를 친 풀밭 말고도 옆의 샛길로 이어진 작은 공간이 더 있었다. 그곳에도 많은 백패커들이 알록달록 텐트 집을 짓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무지개색으로 텐트를 친 곳도 있었다. 백패킹 크루가 생각보다 많았다. 사람은 많았지만 다들 조용히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질녘이 되어 챙겨 온 저녁을 먹었다. 저녁으로 비건 냉동 볶음밥과 만두, 컵라면을 챙겨 왔다. 발열 도시락으로 따뜻하게 데웠지만 바람이 계속 불어 음식이 금방 식어버렸다. 후식으로는 비건 보틀 케이크를 챙겨 왔다. 괜히 욕심내서 3개나 챙겨 오는 바람에 다 먹어 갈 때쯤엔 케이크로 배가 불렀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노랗게 물들이며 가라앉는 해가 아름다웠다. 바람이 차가워 텐트 안으로 옮겨, 넘어가는 해를 마저 바라보았다. 해가 지는 방향을 생각지 않고 자리를 잡았는데 텐트 안에서도 노을을 지켜볼 수 있어 좋았다. 그 시간만큼은 선자령에 있는 모두가 할 일을 제쳐두고 노을을 바라보았다.
나는 바깥공기가 찰 때 침낭 속에 들어가면 잠이 솔솔 온다. 코는 시린데 침낭 속은 아늑한 것이 왜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그 온도차가 내 마음을 편안하게 녹여준다. 깜빡 잠이 들어 그의 밤 산책도 따라나서지 못할 뻔했다. 그래도 드넓은 초지에 펼쳐진 오색의 텐풍을 놓칠 순 없었다. 저녁에 도착한 백패커들의 텐트까지 포함해 초지를 가득 메운 텐트의 불빛은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대차게 불었던 바람이 거짓말이었던 듯, 선자령의 아침은 평온했다.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던 시끄러운 바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초지의 아침 풍경이 우리를 반겼다. 이제 선자령에 인사를 고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자리를 말끔히 정리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은 또 한 번의 꽃구경, 풀 구경, 풍경 구경으로 시간을 한참 빼앗겼다. 이번엔 올라왔을 때와는 다른 길로 내려가 보기 위해, 대관령 전망대가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대관령 전망대에 올라 바라본 풍경에 가슴이 시원하게 트였다. 멀리 강릉 바다까지 보이는 놀라운 풍경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만나 한동안 전망대에 머물며 대관령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선자령 들머리에 있는 사찰인 국사성황사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자 중요무형문화재인 강릉단오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행사가 궁금하여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박배낭을 메고 쭈뼛쭈뼛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우연치 않게 볼거리를 만나게 되는 것도 여행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많은 어르신들이 행사를 보기 위해 모여 계셨다. 우리는 작은 무대에서 공연이 준비되는 과정만 잠시 지켜보다 조용히 자리를 비켜드렸다.
사찰에서 올라올 때와 같은 길로 하산하던 중 올라갈 땐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계곡을 발견했다. 올라올 때 걸었던 포장도로를 다시 걷기 싫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으로 흙길이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우리이 발걸음은 더 가벼워졌다. 흙과 돌맹이를 밟아 넘으며 신나는 하산길을 걸었다. 졸졸졸 계곡물소리에 맞춰
여러 곳에서 새소리가 들려오는 아기자기한 길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횡계터미널로 가는 440번 버스는 하루 4차례밖에 운영을 하지 않아 시간 맞춰 오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더랬다. 예전부터 오고싶었던 선자령을 오지 못하고 미뤄두었던 것도 이 버스 배차간격이 걱정되어서였다. 혹시 버스를 놓칠까봐서 이래저래 시간계획을 수정해보곤 했었다.
우리는 조금 이른 점심으로 횡계터미널 근처에서 막국수를 먹었다. 막국수가 주로 채식인 곳이 많아서 우연히 찾아간 곳이었는데 알고 보니 만화 식객에 나온 유명한 가게였다. 아직 점심시간이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우연히 유명한 가게를 찾아들어간 것이 신기했다.
식사를 맛있게 마치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터미널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떼가 많았다. 바지런한 제비들을 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다시 서울로 향하며 우리의 선자령 여행을 마쳤다.
300mm - https://youtu.be/pji2IhuW_R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