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민둥산 백패킹
벌써 세 번째이다. 한 번은 비가 와서, 한 번은 열차를 놓쳐서 민둥산에 가지 못했다. 열차표를 사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민둥산행 기차표는 금세 매진되어 우리가 일정이 맞아도 표를 구하지 못해 무산되곤 했다. 그렇게 여러 번 엎어졌던 민둥산 백패킹이었다. 드디어 그곳에 가게 된 것이다. 민둥산으로 향하는 기차는 여러 곳에 정차하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청량리에서 출발해 동해로 가는 열차로 수많은 사람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민둥산까지는 3시간이 걸렸다.
한적하고 자그마한 역에 내렸다. 백팩을 짊어진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속마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따 산에서 보아요. 백패커는 우리를 포함하여 다섯 정도가 보였다. 우리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근처 밥집으로 가서 우선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이곳은 어디를 가도 민둥산 억새밭 사진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곳. 강원도 정선 남면이다. 역 앞에 위치한 밥집에 들어가 곤드레밥을 주문했다. 쟁반에 오롯이 담겨 나온 반찬 하나하나가 맛있었다. 그렇게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식당에서 나와 몇 걸음 걸으면 숨겨진 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빵을 두어 개 사서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곤 민둥산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걷기 시작했다.
민둥산역은 그 이름에 걸맞게 역으로부터 조금만 걸으면 민둥산 들머리가 시작된다. 서울의 바위산과는 다른 우거진 숲을 만났다. 잘 다져진 흙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민둥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4갈래가 있고, 우리는 완경사로 표시되어 있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많은 등산객들이 급경사라 표시된 짧은 길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조금 길고 돌아가는 길일지라도 한적한 등산길을 걷고 싶었다. 날이 좋아서 짊어진 가방의 무게가 가벼워졌음에도 백팩을 메고 산을 오르는 일이 오랜만이라 쉽지만은 않았다. 나무 그늘에 놓인 벤치가 보이면 앉아서 잠시 쉬어가며 산행을 계속했다. 등산로에는 이름 모르는 나무들이 한결같이 곧게 뻗어있었다.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 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누구는 그렇게 묻지만 등산은 끝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때문에 등산은 할 맛이 난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어깨가 아파와도 끝이 있다는 걸 아니까 계속 걸을 수 있다. 도대체 언제 끝나나 싶을 때 등산은 끝난다. 초등학교 때 계족산으로 소풍을 갔다. 나는 등산이 처음이라 뒤쳐지고 뒤쳐져 최하위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체중이 꽤 나가던 대여섯의 친구들과 느릿느릿 산을 올랐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상에 산성이 있었던 것 같다. 돌무더기를 밟고 그 산성 위까지 다다랐을 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을 느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거대한 뿌듯함. 비로소 사방이 트여 불어오는 산들바람.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노상 투덜거리며 오르던 나도 앞으로 등산을 자주 해야지 다짐하게 했던 그 기분. 등산을 해야지만 느낄 수 있는 바로 그 기분이다.
조금씩 산 능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민둥산은 정직한 산이다. 산 위에 나무가 없이 헐벗은 풀밭이 펼쳐져 있어 민둥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빼곡히 들어찬 숲을 뚫고 올라온 우리의 시선이 환해졌다. 파랗게 펼쳐진 풀밭에 하얀 울타리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풍경은 언제나 단순한 선을 갖고 있었다. 민둥산의 풍경은 군더더기가 없더라. 둥그스름하게 솟아 오른 봉우리들 위로 얇게 펴 바른 듯 푸른 잔디가 돋아 있았다. 화려하지 않고 멋 부리지 않은 모습이 담백하니 좋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풍경 그 자체였다. 민둥산은 가을 억새가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름 민둥산을 찾았다. 은빛 억새도 멋들어지겠지만 잔잔한 여름 민둥도 그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아직 시간이 다소 이른 감이 있어 짐을 내려두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산 위에 펼쳐진 풀밭이 보기에 좋더라. 소박하게 둘러쳐진 울타리 길을 따라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걷다 보니 움푹 파인 독특한 장소를 만났다.
민둥산에는 돌리네라는 독특한 지형이 있다. 석회암이 용식되어 나타난 구덩이라고 한다. 그곳에 물이 고여 자그마한 연못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돌리네 가까이 다가가면 그곳에도 활발한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다. 붉은 점무늬가 있는 개구리들, 이름 모르는 곤충들이 수면에 잔잔한 무늬를 그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물이 그린 것처럼 둥근 원을 만들고 있다. 그 둘레를 한 바퀴 걸어보았다. 어쩜 이리도 자연스러울까. 자연은 인간의 창작을 넘어서서 창의롭고 아름답다.
가벼운 산책을 끝내고 짐을 내려두었던 박지로 돌아와 집을 지었다. 우리 옆에는 마음씨 좋은 백패커 분들께서 자리를 잡으셨다. 저녁으로 겨우 빼빼로 하나씩을 갖고 올라왔던 우리였다. 옆에 계신 분들께서 장어탕을 맛보라며 넉넉하게 덜어 나누어 주셨다. 덕분에 따스한 국물로 몸을 녹였다.
아침이 밝았다. 밤새 울던 고라니도 해가 뜨니 조용해졌다. 바지런한 새들만이 노래를 부르며 밝아오는 아침을 반기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 사 두었던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텐트 앞에 펼쳐진 풍광을 마주하고 담백한 빵을 한입씩 우물우물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왔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곱게 핀 들풀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 걸음을 느려지게 했다. 다음날은 평일이라 그런지 민둥산이 텅 비었다. 사람 없는 산의 모습처럼 고요한 것이 있을까. 터벅터벅 산 정상을 걸어 내려오며 사람 없는 민둥산 본연의 모습을 보는 호사를 누렸다.
점심은 민둥산역 가는 길에 있는 막국수 집으로 갔다. 어제의 점심도, 오늘의 점심도 맛이 좋았다. 정선엔 맛집만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열차 시간이 남아 역 앞 카페를 다시 찾았다. 달콤한 와플과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했다.
역무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 익숙한 무궁화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선로로 들어섰다. 그렇게 이번 여행이 끝났음을 확인했다.
300mm - https://youtu.be/2Nl8aXxIL3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