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사량도 백패킹
우리는 오랜만에 다시 통영으로 향했다. 어디서나 아름다운 바다가 내다보이는 통영. 이곳에서 우리는 사량도와 매물도로 백패킹을 떠날 것이다. 첫 번째 섬은 사량도. 통영 터미널에 내려 버스 정류장에서 기웃기웃 가오치항 가는 버스를 찾고 있었다. 앞에 앉으신 어르신께서 엉덩이를 들썩들썩하셨다. 돌아보니 우리 짐이 무거워 보여 옆자리에 앉히시려 하신 거였다. 어디 가냐 물으셔서 가오치항이라고 말씀드렸다. “아 까오치!” 까오치항 가는 버스를 찾아주시려 하셨다. 버스가 금방 지나갔다 하셔서 근처 빵집에서 빵을 사서 나온 사이 버스 한 대가 더 지나갔다. 어르신께서는 우리 쪽으로 급하게 나오셔서 까오치 까오치 하셨다. 마음 써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야겠다고 말씀드렸다. 통영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이번 사량도 여행에서 우리는 여러 번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일단 박지부터 정하지 못해 갈팡질팡 하였다. 지리산에서 출발하는 종주코스를 등반하고 고동산에서 1박을 할 것인지, 지리산 위에서 묵을 것인지, 바닷가 근처의 데크에서 묵을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우리가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사량도에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이 그 발단이었다. 밥을 먹으며, 배를 타고 이동하며 우리는 사량도에서의 일정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했지만 답은 없었다. 그렇게 구체적인 계획을 미처 정하지도 못한 채로 사량도를 마주했다.
섬에 도착하니 2시 50분이었다. 뱃시간에 맞춰 버스가 있다고 했던 정보와 달리 짝수 시간에 출발하는 배는 정규선이 아니라 버스가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안 그래도 늦었는데 1시간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조급해졌다. 일단 지리산 들머리로 이동하기로 했다. 늦은 버스에 올라탔을 때 백패커 한 분이 보였다. 우리같이 늦은 사람이 또 있다니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조바심 내지 말자. 욕심 내지 말자. 여행은 흐르는 성질의 것이다.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자고 생각했다. 큰 마음을 먹어야 올 수 있는 먼 고장, 통영이다 보니 욕심이 났다. 욕심을 따라 불안이 찾아왔다. 망칠까 봐 불안했다. 부족할까 봐 불안했다.
등산을 하는 동안 우리의 계획은 계속해서 수정되었다. 사량도 종주는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길이었고, 아마도 산중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미리 끊어두었던 내일 배표를 취소했고, 내일 아침엔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를 다시 역산해 보았다. 그렇게 산을 기웃기웃하며 오르다가 하룻밤을 보내기 좋은 장소를 발견하였다. 사량도 종주 코스의 첫 산봉우리인 지리산도 미처 다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은 벌써 해 질 녘이 되어 갔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산을 종주하기로 했다. 백패킹은 신기하게도 잠잘 곳이 정해지면 다른 모든 것이 정리되는 여행이다. 우리는 텐트 칠 자리를 잡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해가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우리는 집을 지었다. 자리를 펴고 앉아 터미널 앞 빵집에서 사 온 것들로 저녁을 대신했다. 어느새 노을로 하늘이 물들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를 따라 노을빛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잠시 자리에 앉아 분홍으로 물드는 노을 하늘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사위는 금세 어두워졌다. 문득 동쪽 하늘에 붉은 달이 보였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딸기 달이라고 하였다. 저토록 붉고 거대한 달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낮게 뜨는 달은 도시에서는 건물에 가려 보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일어나 못다 한 종주를 마저 이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달을 바라보다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간에 침낭 속으로 기어들었다.
언제나처럼 새가 노랫소리로 아침이 밝았음을 알렸다. 우리는 어둠이 막 물러나기 시작한 하늘 아래로 나섰다. 짐을 정리하고 다시 등산을 이어갔다. 사량도 종주길은 생각보다 많이 험한 길이었다. 온통 바위로 둘러싸여 낭떠러지로 이어진 가파른 길이 많았다. 박배낭을 메고 올라본 산 중에서는 가장 험한 산이었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등산을 하는 재미는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걸음걸음마다 묻어난다. 우리는 좌우 낭떠러지를 따라 펼쳐진 바다를 둘러보며 바위산을 올랐다.
클라이밍을 하는 것과 비슷한 구간도 있었다. 사실 암벽등반을 할 때는 장갑을 착용하지 않는다. 장갑을 끼면 오히려 손이 미끄러져 더 큰 악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등산을 하는 분들은 왜인지 바위산을 오를 때 장갑을 많이들 착용하시는 것 같다. 클라이머인 우리는 맨손으로 우둘투둘한 바위들을 움켜쥐며 걸음을 옮겼다. 바위가 손에 잡히는 감촉이 재미있었다.
등산로에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어쩌다 이리된 것일까. 조심스럽게 등을 쓸어보았다. 보드라운 깃털 사이로 연약하고 자그마한 몸이 느껴졌다. 우리는 땅을 파고 새를 묻어주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란다.
지리산을 지나 달바위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바위능선을 따라 불안한 걸음을 옮겼다. 위험구간마다 우회로가 있었지만 우리는 더 좋은 풍경을 보기 위해 위험구간으로 올랐다. 좌로 우로 바다 마을이 내려다보였다. 마치 거대한 공룡의 등 위에 올라선 듯 한 기분이었다. 흙길과 달리 걸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걸으면서도 이 길이 등산로가 맞는지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무작정 앞으로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달바위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종주가 끝남을 알리는 출렁다리는 아직도 멀찌감치 보였다. 조금씩 지쳐갔다. 종주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박배낭을 메고 있어 더 그런 것일까? 다리는 무거워지고 옷은 땀에 젖어갔다. 하지만 앞에 남아 있는 길은 내가 걸은 만큼만 줄어든다. 온전히 내 몫으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산에 오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앞에 남은 내 몫의 길은 모두 나의 책임이다.
가마봉, 옥녀봉에 도달할 때마다 짐을 잠시 내려두고 쉬었다. 이어지는 등산길에는 가파른 계단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 같았다. 내려가면 또 그마만치 올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은 그런 것이었다. 때문에 내려갈 때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마침내 출렁다리를 만나고 하산이 시작되었다. 무거웠던 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바위능선이 서서히 흙길로 바뀌었다. 도로에 지나다니는 차소리가 들렸다. 하산이 끝나간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물을 부족하게 준비한 탓에 등산하는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하산 후 만난 편의점 간판이 마치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편의점 앞에 앉아 이온음료를 한 병씩 비웠다.
항구에서 표를 끊어두고 근처 식당으로와 이른 점심을 먹었다. 이름은 해물된장찌개인데 메인은 된장이 아니라 해물이었다. 거의 해물탕에 가까운 푸짐한 식사였다. 결국 계획은 다 틀어졌다. 우리는 예상했던 것보다 늦은 배를 타고 다시 통영으로 돌아왔다. 계획은 틀어지는 것이다. 그는 계획형이고 나는 즉흥적이다. 때문에 그가 세운 계획을 내가 즉흥적으로 보완해 가며 이번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지만 부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300mm - https://youtu.be/oNhHKvEx_5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