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으로 채워진 하루
바다에서 햇볕을 한참 쬐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거리로 나왔다. 우리는 해변에 설치된 샤워기에서 대충 소금기만 헹궈낸 후 수영복 차림 그대로 거리를 걸었다. 챙겨 온 옷을 젖은 수영복 위에 입기 싫었다. 한국이었다면 조금 부끄러웠을 텐데, 이곳에선 다들 비슷한 옷차림이라 아무렇지 않았다. 가벼운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편안하고 기분 좋았다. 수영복은 뙤약볕에 서서히 말라갔다.
우리는 어제 사전예약을 하지 못해 헛걸음했던 구엘공원으로 향했다. 구엘공원을 검색해 보면 흔히 보이는 사진이 있다.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울타리 너머로 바르셀로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공간이다. 나는 그러한 모습이 구엘공원의 전부인 줄 알았다. 이리저리 찾아봐도 그 장소의 사진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더라. 구엘공원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넓고 크며, 걸으면서 마주하는 공간들이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색색의 타일로 장식된 곳은 오히려 일부일 뿐이었다. 마치 진흙과 돌덩이를 쌓아 붙여 형성해 낸 것 같은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아래를 걷고 있으면 돌덩이들이 금방이라도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이곳의 주민들은 공원 입장이 무료인 것 같았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온 사람, 아름다운 공원에서 조깅하는 사람, 친구들과 담소 나누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노인들이 만드는 풍경 덕분에 관광지가 아닌 공원으로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유명한 건축물이나 오래된 유적지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저 바라만 보는 용도가 아니라 제 몫의 역할을 아직도 해내고 있는 공간들은 계속해서 살아 숨 쉰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조금 멀리 떠날 예정이다. 숙소 근처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간단히 먹을거리를 사고 마실 물과 간식도 챙겼다. 오늘의 목적지는 몬세라트라는 바르셀로나 근교의 산이다. 이곳에는 산타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수도원 내부를 둘러보고 주변을 걸으며 독특한 산세도 살펴볼 계획으로 이곳에 왔다.
수도원 입장시간 전까지 잠시 시간이 있어 수도원 건물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크고, 산을 오르는 방법도 여러 갈래가 있는 것 같았다. 표지판이 복잡하게 여러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수도원을 대표하는 검은 성모마리아상이 발견된 장소라는 산타코바 예배당에 가보기로 했다. 예배당까지 길게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성경의 내용을 형상화한 조각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된다. 성경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나지만, 조각상들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면 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꺾어진 길을 틀 때마다 다른 작품이 나타났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걸어 들어가면 산타코바 예배당에 도착하게 된다. 예배당에서 마주친 분이 본인을 이곳 카탈루냐 사람이라 소개하며 이 장소에 와보길 정말 잘한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에게 이 장소가 매우 의미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종교가 없는 우리지만 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잠시 예배당에 앉아 공간을 곱씹어 보았다.
산타코바 예배당을 보고 느긋이 수도원으로 돌아오니 우리의 입장시간이 되어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차례차례 수도원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티켓을 확인받고 안으로 들어설 때 수도원 직원분이 남자는 모자를 벗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이 예절이라고 알려주셨다. 우리는 그저 관광객의 입장에서 이곳을 방문한 것이지만, 누군가는 진심으로 이곳에 오길 꿈꾸었을 것이다. 간절하게 검은 성모마리아 상에 손을 얹고 기도할 것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성스러운 공간에서 벅차오름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 종교시설을 방문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그 공간에 담긴 진심만은 공기처럼 남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나도 이 공간에, 그들의 진심에 예를 갖추고 싶어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우리는 수도원에서 나와 푸니쿨라를 타고 산 위로 올랐다. 등산로 옆으로 자란 나무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암질의 바위들이 높게 솟아올라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클라이밍이 취미인 우리는 곧게 뻗어 오른 암벽들에 절로 눈이 갔다. 마침 맞은편에 자일을 어깨에 둘러메고 걷는 이들이 보였다. 잠시 인사 나누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근처에 개척된 루트가 1000개 이상 있다고 하셨다. 완등 후 내려다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지만 장비를 챙겨 오지 못한 우리는 아쉬운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짧은 트레킹을 마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 멀찌감치서 바라보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왔다. 우리가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 해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 빛이 성당 안을 여러 빛깔로 밝히며 무채색의 성당 내부에 생기를 가득 더하고 있었다. 100년이 넘도록 공사 중이지만 아직도 미완성이라는 성당. 지어진 지 오래되어 색이 변한 곳과 비교적 최근에 완성되어 깨끗한 부분이 한 건물을 이루고 있었다. 완성되기도 전에 나이를 먹은 건물. 우리는 그곳에서 무시무시한 가우디의 집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성당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낯선 도시가 단 며칠 만에 익숙한 얼굴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마트에 들리거나 식당에 갈 때에도 조금 더 편안한 모습이 된다. 이곳의 음식에 친숙해지고 숙소가 가까워지면 며칠 내내 오가던 거리를 만나며 집에 돌아온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벌써 바르셀로나 여행 마지막 날이 되었다. 우리는 어느새 쌓여버린 빨래를 하러 아침 일찍 코인세탁에 들렸다. 중간에 빨래를 해야 할 정도로 이렇게 긴 여행은 처음인데 벌써 한 도시를 마무리한다니,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아쉬움이 컸다. 그 며칠뿐인 여행동안에도 바르셀로나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걸으며 정이 들어버린 탓일까. 내 앞에 남은 여행이 줄어드는 것이 싫은 탓일까. 여행은 낯설면 낯설수록 좋더라. 지하철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의 안내음성,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처음 보는 식당의 음식들, 바닥에 깔린 보도블록의 형태, 가로수 나무의 종류까지 낯선 것들이 모여 나의 하루를 길게 만든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우리는 다시 낯선 곳으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