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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여행 : 프랑스 리옹

순간을 뇌리에 깊이 남기는 법

by 이사공

떼제베를 타고 프랑스 리옹에 도착했다. 우리를 둘러싼 언어는 스페인어에서 불어로 바뀌었다. 프랑스 파리는 지난 유럽 여행에서 한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파리가 아닌 다른 도시에 오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리옹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후 우리가 걷게 될 트레킹 코스 투르 드 몽블랑으로 가는 버스를 고려한 것이었다. 투르 드 몽블랑의 시작점인 프랑스 샤모니에 가기 위해서 보통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리옹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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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은 시간 리옹에 도착했던 터라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밖으로 나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가게들도 문을 닫았지만, 바지런한 빵집들은 벌써부터 탐스러운 빵들을 구워내 진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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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리옹에 대해서 딱히 조사해 둔 것이 없었다.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숙소에서 다리만 건너면 만나게 되는 리옹의 올드타운은 아름답게 나이 든 건물과 상점으로 가득해 그것만으로도 볼거리가 잔뜩이었다. 색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낡은 건물들은 마치 웨스앤더슨 감독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지만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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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와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 혼자 있는 시간보다도 그와 둘이 있을 때 더 깊은 안정감이 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둘이 함께 세계를 여행 다니며 사는 것이다. 늘 그런 미래를 그리며 계획을 세워보고 그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곤 한다. 계속해서 여행을 다니게 되면 집은 어떻게 할 것인지, 여행비용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 또 우리가 언제까지 그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 하는 것들을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 날은 그 미래가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그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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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가능하면 자주, 멀리, 그리고 오래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원래부터 여행을 자주 떠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근처 술집에서 가까운 친구를 만나 몇 시간이고 수다 떨며 서로 술잔을 채워주는 것이 일상에서 즐기는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족하다 생각지 않았다. 부족한지 몰랐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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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을 시작하고 부지런히 국내 여행을 다녔다. 주말이면 당연하다는 듯이 짐을 싸고 집을 나섰다. 캠핑을 가도 음식을 해 먹거나 술을 거나하게 마시는 일이 거의 없는 우리이다 보니, 그러면 캠핑하러 가서 무얼 하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사실 무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바깥에 앉아 바람을 맞고, 낯선 풍경을 보고, 그것을 눈에 한껏 담아 돌아오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둘이 함께 보내는 그 시간이 소중하고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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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여행 다니자는 얘기를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많이 가자. 우리 대화의 8할은 앞으로의 여행계획들로 채워져 갔다. 그러면서 우리 여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휴대전화 카메라로 성의 없이 찍은 영상들을 짜깁기하여 만든 영상이 전부였다. 그러다 카메라를 잘 다루는 그가 기록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가 촬영한 영상에 내가 여행 중에 끄적인 글들을 더해 완성해 보았다. 이렇게 만든 영상들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불현듯 찾아오는 그리움이 있을 때마다 수월하게 꺼내볼 수 있는 추억의 조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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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우리는 한 달 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어디를 갈 것인지,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이 소중한 기회를 가치 있는 시간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더랬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계획을 짜고, 준비했지만 그럼에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여행이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랬던 우리가 벌써 첫 번째 여행지 바르셀로나를 떠나 리옹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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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행을 왜 하는 것인지 앞서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우리는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 가능하면 모든 것을 둘이 함께하려고 노력한다.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한 만큼 그 시간을 조금 더 의미 있는 추억들로 촘촘히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일상도 좋지만, 하루하루 익숙한 모습을 한 일상은 시간이 흐르면 기억에 남아 있는 부분이 적어진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흐릿해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아쉬웠다. 조금 더 선명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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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을 뇌리에 깊이 남기는 방법은 낯선 감각을 가까이 두는 것이다. 낯선 곳에 가거나,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시간을 추억으로 가득 채워 다채롭게 만든다. 마치 타임라인에 스탬프를 빼곡히 찍어나가는 것과 같이 시간의 밀도가 더 높아진다. 우리는 부지런히 스탬프를 찍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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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시를 걷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에 사는 우리에겐 마천루가 익숙하다. 그래서 젊은 빌딩들로 채워진 도시보다는 지긋이 나이가 든 도시에 묻어나는 역사와 풍경을 사랑한다. 유럽엔 비교적 나지막하고 낡은 건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때문에 도시마다 얼굴이 다르고 풍기는 분위기도 제각각이다. 그들의 역사가 오롯이 살아남아 공기에 맴돈다. 그런 공기 속을 걷는 것이 좋다. 내가 봐오던 서울의 풍경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그저 걷기만 해도 발걸음에 즐거움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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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타운을 걷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골목으로 급히 피했다. 그때 등 뒤에서 한국어 말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분들과 가까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들은 은퇴 후 여행을 다니며 살고 계신 중년 부부였다. 불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시는 멋진 분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여행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셨다. 젊을 때 더 많이 여행 다니라는 이야기도 여러 번 강조하셨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는 말씀들을 해주시니 괜히 귀에 더 쏙쏙 박히는 것 같았다.


그분들께서 리옹의 비밀통로 트라불(Traboules)을 알려주셨다. 트라불은 건물로 빼곡히 들어찬 리옹을 짧게 관통하여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숨겨진 통로를 말한다. 구글에 리옹 트라불을 검색해 보면 트라불 지도를 찾을 수 있고 몇몇 유명한 트라불은 벽면에 자그마하게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붙어있기도 하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된 낡은 건물들 내부를 관통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리옹의 뒷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보물찾기 하듯 트라불 투어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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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의 마지막 날 저녁엔 아이리쉬펍에서 맥주도 한잔 마셨다. 바깥에 사람들이 잔뜩 서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곳 말고는 자리가 없어 기웃기웃하는 우리를 그들이 끌어다 앉혔다. 맥주 한 잔을 비우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극적으로 우리를 불러 세웠던 분은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곳에서 만났던 한국인 여자 친구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직도 그리움이 남아 있다며 그의 달콤한 연애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어느 거리의 식당들은 투어리스트 트랩이라 바가지를 씌우니 저녁은 다른 골목의 식당을 가보라며 여행 팁도 알려주셨다. 여행에서 현지인과 이야기 나누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운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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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타운을 샅샅이 돌아보며 리옹의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떠날 채비를 했다. 다음 여행지는 프랑스 샤모니, 앞서 이야기한 투르 드 몽블랑 트레킹의 시작점이다. 이번 한 달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기대했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도시 구경은 잠시 멈추고, 이제 자연으로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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